세계역사

남미 독립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

frog.ko 2020. 11. 5. 13:28

시몬 볼리바르는 지금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파나마를 스페인 식민 통치에서 해방한 남아메리카의 독립 영웅이다. 오늘날에도 볼리바르는 남아메리카의 '해방자'이자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볼리비아'라는 나라 이름, 베네수엘라 화폐 단위 '볼리바르'는 모두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볼리바르는 18세기 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아메리카는 약 300년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에서 대농장과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스페인 상류층 출신이었다.

 

그는 가정교사를 통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인 루소가 역설한 자유, 평등, 해방의 가치를 배웠으며 스페인에서 유학한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803년부터 프랑스와 미국에 머무르면서 남아메리카 독립을 꿈꾸게 된다.

 

특히 미국이 독립 후 연방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아 남아메리카 국가들도 독립 후 미국처럼 합중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07년 베네수엘라로 돌아온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흑인 노예를 위해서, 남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해서, 메스티소(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를 위해서 독립을 꿈꿨던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볼리바르의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은 '남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스페인 식민 세력에 차별받던 크리오요(중남미로 이주한 스페인계 백인 후손)를 위한 것이었다. 크리오요는 유럽인과 같은 피가 흘렀지만, 식민지 정부 요직을 차지하기 어려웠다. 남아메리카 출신 크리오요가 남아메리카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볼리바르의 생각이었다.

크리오요( Criollo):어원은 포르투갈어인 "크리올루", 아메리카 식민지에 거주하던 스페인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혼혈들을 나누던 계층들 중에 하나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태어나 식민지에서 자라는 순수혈통 페닌술라르(peninsular) 바로 밑 계층으로, 유럽인의 혈통으로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유럽인의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과 페닌술라레스의 차별에 반발해 남아메리카 뿐만 아니라 필리핀에서도 크리오요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페닌술라르(peninsular):스페인령 미국 서부/서남부/동남부 및 라틴아메리카 등 아메리카 신대륙 식민지를 다스리면서 유럽인과 원주민 혈통을 구분하면서 만든 계급 중의 하나로, 이베리아 반도(Península ibérica)에서 태어난 백인들을 말한다 

볼리바르는 1810년부터 병력을 이끌고 스페인군과 전쟁을 벌인다. 정규군과 전투에서 볼리바르는 잇달아 전투에서 패배해 1814년 아이티로 망명을 떠났다. 그렇지만 볼리바르는 재기에 성공한다.

 

그는 18192월에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해 의회를 구성하고 '그란 콜롬비아' 혁명정부 수립을 공표합니다. 그 뒤로 1824년까지 베네수엘라,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와 파나마), 키토(에콰도르), 페루, 그리고 볼리비아 일대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볼리바르는 지금의 남미 6개국(베네수엘라·콜롬비아·파나마·에콰도르·볼리비아·페루)을 독립시켰고,' 해방자(El Libertator)'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란 콜롬비아의 종신 대통령을 지내던 시몬 볼리바르는 연이은 반란과 권력투쟁 등으로 오명을 뒤집어쓰고, 결국 1830년엔 대통령직마저 사임한 채 콜롬비아로 떠나간다.

 

은퇴 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의 별장에서 요양하다가, 폐결핵으로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 농장에서 47세에 죽는다. 참고로 은퇴한지 8개월만에 사망한터라 이 사람도 최후는 초라하였다.

루스 데 아메리카(1809)콜롬비아 독립선언(1810)베네수엘라 제1공화국(1810~ 1812)베네수엘라 독립선언(1811)누에바그라나다 연합주(1811~ 1816)베네수엘라 제2공화국(1813~ 1814)베네수엘라 제3공화국(1817~ 1819)그란콜롬비아(1819~ 1831)에콰도르 독립(1830)베네수엘라 독립(1831)누에바그라나다 공화국(1831~ 1858)

 

아르헨티나

 

177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한 신생(新生)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 속했다.

 

1807년 에스파냐가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몰락하자 남아메리카 각지의 크리오요들이 들고일어나 독립을 외쳤는데, 아르헨티나 독립(1810년 5월)은 그 결실 중 하나였다.

 

당시 라틴아메리카 지배층의 대부분을 이루던 크리오요들은 본국의 에스파냐인들로부터 신분적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고,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는 계몽사상에 깊이 빠져 있었다.

 

독립의 주역 산 마르틴은 이후 파라과이, 칠레 등의 독립에도 기여해 시몬 볼리바르(대콜롬비아 건국 참조)와 더불어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라 일컬어진다.

처음에는 라플라타 부왕령 자체가 그대로 라플라타 합주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합주국의 내부 다툼이 격해져 상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던 볼리비아, 우루과이 그리고 파라과이가 이탈하게 된다.

 

1880년과 1929년 사이 아르헨티나는 경제 성장을 계속하여 당시 세계적으로 부유한 10개국 중 한 곳이었으며 농업 수출 경제로 이익을 보았다. 이민이 늘고 사망률이 떨어지면서 아르헨티나 인구는 5배로 늘었고, 경제는 15배로 확대되었다.

South America, early 20th ce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