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러시아의 총면적은 1,707만 5,400km², 남북의 길이가 2,500~4,000km이고 동서가 9,000km에 달한다.
현재 러시아를 구성한 최초의 민족인 슬라브인의 조상들은 200년 무렵부터 500여 년 동안 지금의 루마니아와 체코, 슬로바키아에 걸쳐있는 카르파티아산맥 동북쪽 산림 지대에 정착해 살았다.
슬라브 민족은 게르만, 라틴, 앵글로-색슨, 발트 민족 등과 함께 유럽 대륙의 주요 민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잦은 외세의 침입을 견디지 못하고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가게 되면서 서슬라브인·남슬라브인·동슬라브인 3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서슬라브인은 오늘날의 폴란드·체코, 슬로바키아·소르비아인에 속하고, 남슬라브인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불가리아·몬테네그로인에 속한다. 그리고 동슬라브인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스인에 해당된다. 즉, 동슬라브인이 러시아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주인공이었다.
러시아 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은 북유럽 발트해 연안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남쪽으로 이동해 온 상인들이었다. 슬라브인들은 이들을 ‘노르만족’ 또는 ‘루스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킹’들이다.
흔히 러시아의 민족은 슬라브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러시아라는 국가를 설립을 하고 대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한 러시아 왕국의 건국시조는 슬라브족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해적으로 잘 알고 있는 바이킹 족들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은 Rus족인데, 이 Rus족은 슬라브족과 바이킹족의 혼혈민족인 것이다.
루스인들은 그저 가장 부유한 도시로 알려진 비잔티움 제국을 눈독 들이며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격을 했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힘이 약했던 슬라브인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9세기 중엽 슬라브족들 내부에 분란이 자주 일어나면서 오히려 슬라브인들 스스로 루스인 지도자에게 자신들의 통치자가 되어 질서를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이에 루스인의 지도자였던 ‘류리크’가 슬라브인들이 사는 노브고로드 지역에 공국을 세웠다.
‘류리크’의 사망 이후 다음 지도자였던 ‘올레그’가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옮기면서 882년 ‘키예프 루스(키예프 루스 대공국이라고도 부른다)’를 건국했다. 이후 키예프 루스는 988년 블라디미르 1세 때 동슬라브 부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동방정교)를 도입했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는 계승권 투쟁과 내부 분쟁으로 세력이 약화하고, 1237년부터 본격적으로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1240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몽골인들은 루스 땅으로 직접 들어가진 않았다. 대신 몽골 원정군을 이끌던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볼가강 하류의 사라이 지역에 본영을 정하고선 동슬라브를 다스리는 전초기지로 정했다(‘킵차크 칸국’). 이후 볼가강 유역 초원지대의 투르크계 유목 부족으로서 몽골인들의 원정에 직접 참여하고 그들에게 충성하는 ‘타타르’ 유목민들이 몽골인의 위세를 빌어 동슬라브인들을 지배했다. 이렇게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스 땅은 몽골-타타르의 지배를 받는다.
1263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류리크 왕조 출신)가 모스크바 지역을 영지로 획득하고, 1283년 모스크바를 수도로 정하면서 ‘모스크바 공국’을 건국했다. 14세기 무렵 이반 1세는 킵차크 칸국의 ‘칸’으로부터 루스 땅의 대리통치자 직위인 ‘블라디미르 대공’을 얻어 모스크바 공국을 대공국으로 격상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380년 쿨리코보 벌판에서의 몽골-타타르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로써 몽골-타타르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후 1480년 이반 3세 시기 타타르의 군사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가 자진 철수하면서 점령기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이렇게 자신들의 힘으로 이민족의 지배를 끝낸 경험은 내부통합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반 3세는 1505년까지 집권하면서 법전 편찬, 농노제 확립, 신분 질서 구축, 통치권 세습의 원칙확립 등 모스크바 대공국의 골간, 즉 전제정치 체계를 확립했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1453년 멸망)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해 자신을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로 칭했다.
또한 이반 3세는 로마 황제의 쌍두독수리를 러시아의 문장으로,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당시로마는 종교적 중심으로 인식되었다. 동방정교를 그리스도교의 정통이라고 생각한 것을 봐도 알수 있다)로 공표했다. 이반 3세의 손자 이반 4세(이반 뇌제, 1530~1584)에 이르러 전제정치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공후가 아닌 최초의 러시아 ‘황제’(Caesar, 차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도 이 시점(1547년)부터다. 하지만 권력이 강해질수록 그 절대 권력에 대한 탐욕은 커졌으며 농노제는 극심해졌다. 1598년부터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겨 1613년까지 차르가 없는 ‘대동란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러시아는 1601~1603년 사이에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2백만 명이 죽는 대기근을 겪었고, 1605년~1618년 사이에는 ‘참칭자 드미트리 전쟁(폴란드-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 제1공화국에 일시적으로 점령당했다.
이듬해인 1613년, 이반 4세가 세습대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신분제 의회인 ‘전국회의’는 당시 유력한 대귀족이자 모스크바 총대주교였던 표도르 로마노프의 아들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했다.
이로써 862년 류리크의 루스 땅 진출로 시작해 700년이 넘어 계승되어 온류리크 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 로마노프 왕조는 이후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 1682~1725) 집권 시기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국호를 ‘러시아 제국’으로 제정하며 절대주의 황정의 시대로 나아갔다. 이렇게 1917년 마지막 황제니콜라이 2세 때까지 300년간의 로마노프 왕조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