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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씨족'보르지긴 가문'

frog.ko 2020. 11. 1. 07:47

칭기즈 칸의 후손을 일컫는 말. 정확히는 보르지긴 가문 중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에 국한되는 범위다. 족보학 등이 발달한 농경민족이 혈통을 더 중시할거 같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유목민족들이 더 혈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칭기즈 칸이 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능력 이전에 그가 몽골의 칸이 될 수 있는 하얀뼈 씨족이었기 때문이고 자무카가 치노스 족 남성 학살같은 잔혹행위를 했던 것도 그가 아무리 능력 좋아도 칸이 될 수 없는 검은뼈 씨족이었기 때문이다.

 

골품제 정주 농경민의 경우 혈연 이외에도 지연, 학연 등 여러 가지 연줄이 엮여 사회가 만들어지지만 부족 단위로 이동하며 유목하는 유목민에게는 사실 혈연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 사회적 연줄이 딱히 없다. 애초에 각각의 부족 자체가 혈연집단이고, 이런 각각의 부족들은 같은 조상으로부터 독립해서 갈라져 나온 대부족에 속하기 때문이다.

 

, 유목민 사회에서 혈통집단인 부족은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복지, 생산, 기타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구조이기에 유목민들이 그만큼 혈통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칭기즈 칸이 유목 세계를 한번 통일하고 난 뒤 그의 혈통은 황금씨족이란 이명으로 몽골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대대로 중시되었다.

 

황금씨족은 모계로는 이어지지 않았고 오직 부계만 인정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이후 나타난 유목세계 주변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황금씨족에 속하지 않는다면 황금씨족의 여자들과 결혼해서 어떻게든 연관성을 만들려는 시도들을 했다.

 

대표적인 게 티무르. 그리고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인 충선왕인데, 이들 역시 황금씨족으로 몽골 황실 황족들의 회의체인 케식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청나라 황제 또한 황금씨족 여성(주로 동방 3왕가 중 하나인 카사르 울루스 출신)을 황후로 맞는 등 황금씨족과의 연결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티무르나 고려왕과는 다른 점은 몽골 정복을 통해 대칸의 직위를 획득하여 합법적으로 세습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칭기즈 칸 이후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등지에서 칸이라는 칭호는 오직 황금씨족만이 독점적으로 칭할 수 있었다. 이 룰을 어긴 사람도 있었지만, 초원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는 황금씨족이 아니면서 칸을 자칭했기 때문에 부하의 반란으로 살해되었으며, 모굴리스탄 칸국의 찬탈자 카마르 웃딘은 칸을 참칭한 자를 벌한다는 명분으로 티무르에게 침략받았다. 황금씨족으로서 활동한 마지막 인물은 청말 민초 내몽골의 왕공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였다.

 

티무르의 경우 원 멸망 이후 몽골계로서는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인물이었지만,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칸이라고 자칭하지 못했다. 다만 황금씨족의 왕녀와 결혼해 부마를 자처하고 아들, 손자들을 칭기즈 칸의 후예와 결혼시켜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는 했다. 티무르의 경우 모계가 황금씨족이었다. 물론 위에 나와있다시피 황금씨족은 모계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데므치그돈로브(몽강연합자치정부 주석):몽골의 왕족으로, 내몽골에 있었던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몽강연합자치정부의 수장이었다. 덕왕이라는 표현이 유명한데 덕왕은 데므치그돈로브의 중국식 음차명.
1902, 청나라 내몽골 스니트기(蘇呢特旗)[2]에서 명나라 시기에 내몽골을 통합한 다얀 칸의 적통 군왕(郡王)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칭기즈칸의 30대 손으로 황금씨족의 일원이다.

1908
, 아버지가 사망하자 6살의 나이로 군왕에 올랐으며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할 때 외몽골 독립에도 불구하고 내몽골에서 중화민국의 지배를 인정하였다.

이 공으로 위안스카이로부터 1913, 화석친왕(和碩親王)의 지위를 받았다. 1919, 18세의 나이로 친정 체제를 구축하여 내몽골을 다스리게 되었다.

1924
,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선통제를 자금성에서 축출하자 덕왕은 톈진의 일본 조계지를 방문하여 푸이를 알현하였다19252, 쑨원이 베이징에서 국민회의를 소집하자 덕왕도 대표로 참가하였고 선후회의 참의원에 임명되었다.

이때 자신의 영토가 사방 5백리이며, 몽골왕공 대부분이 세습으로 왕위에 앉은 부패한 인물들이라면서 자신들이 그들을 몰아내고 내몽골의 유일한 왕공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후 손봉전쟁, 국민혁명 등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덕왕은 이를 긴밀히 관찰하면서 누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는 지를 지켜보았다. 중국 국민당이 중국의 새 지배자로 떠오를 것으로 보이자 덕왕은 국민당과의 접촉을 준비하였으며 만약 국민당이 내몽골의 자치를 부정할 때를 대비하여 일본 제국과의 접촉도 준비하였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괴뢰국이었던 몽강연합자치정부가 무너지자 데므치그돈로브는 충칭으로 가 장제스를 예방하고 국민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9462차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이번에는 국민정부의 편으로 참전함으로 다시 한번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이미 그의 기반인 내몽골에서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는 청년들이 증가함에 따라 한때 내몽골 인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덕왕은 입지가 크게 좁아졌고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축출되어 난징으로 도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9년 장제스도 무너져 대만으로 도주하면서 중국공산당에 항복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법원에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무순전범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자신의 죄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내몽골은 공산당에 이용당했다고 주장하며 한동안 소신을 굽히지 않았지만 오랜 수감 끝에 굴복하고 자신을 몽골 민족의 죄인이며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자아비판하였다.

 

그는 1960년 특사되어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말년을 보내다가 1963년 내몽골 인민위원회 참의를 지냈다. 1966년 사망했다.

 

카멜레온 같은 인생을 보냈으나 천수를 누린 참으로 특이한 인물로, 내몽골인의 지도자라는 인상이 있어서 그를 죽이면 내몽골인들이 그를 순국한 영웅으로 모시게 될까봐 끝까지 살려 두었다. 그는 자녀 몇명을 남겼으나 장남은 몽골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일을 꾸며 보려다가 1952년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조용히 살았는지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를 마지막으로 칭기즈칸의 황금씨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