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대기근
아일랜드는 아일랜드어 정식 명칭은 에이레(Éire), 빛의 여신 에일린의 이름을 딴 것)라고 하고 영어로는 아일랜드(Ireland)라고 한다. 켈트 신화에 나오는 에린이 바로 이곳이다.
프랑스 갈리아인이 기원전 5세기 경에 아일랜드로 건너와 게일인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다음 그레이트브리튼섬에서 앵글로색슨인에게 밀려난 브리튼인이 건너왔다.
5세기에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성 파트리치오의 날은 아일랜드 최대의 축일이다.
8세기부터 11세기 초에 걸쳐 바이킹이 아일랜드를 침공했다, 이후 바이킹들의 침략이 잦아들었으나 1066년 노르만 가문은 앵글로색슨계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정복하고 잉글랜드의 왕이 되어 세력을 확장했고 이윽고 1172년 아일랜드 남동부 렌스터 왕국의 도움 요청을 빌미로 아일랜드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아일랜드인은 저항하여 노르만 세력을 서서히 몰아냈다.
1534년, 노르만 왕조 헨리 8세가 본격적인 아일랜드 침공을 감행하여 1542년 아일랜드 왕위를 만들고 스스로가 잉글랜드 왕과 겸임하여 잉글랜드와의 동군 연합의 형태로 완전히 복속되었다.
유럽 대륙과 브리튼 섬에서 게르만족으로부터 밀려난 켈트족이 마지막까지 버틴 지역으로 현재 남아 있다. 과거에는 백인들 가운데서 멸시당하는 혈통이었다. 하얀 깜둥이(White Negro)라는 소리마저 나왔을 정도였다.
아일랜드인의 신체적 특징으로는 북유럽과 서유럽의 사람들에 비하여 머리색이 어두운 편이지만 눈동자와 피부색은 밝은 편이라는 것이다.일반적으로 북유럽과 서유럽의 사람들이 멜라닌 색소가 적은 금발벽안을 지니고 남유럽의 사람들은 주로 어두운 눈동자와 머리색을 지니고 있지만 아일랜드인들의 경우 특이하게 이러한 특징들이 정반대로 나타나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처럼 이베리아 반도에 거주하였던 켈트족과 서고트족이 북유럽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물론 머리색이 북유럽과 서유럽의 백인들에 비해서 어둡다는 것이지 사실 금발을 가진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다.그리고 가장 독특한 것은 적발 유전자를 보유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편이라는 것인데, 그로 인하여 현대에서는 희귀한 자연 적발의 머리색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서양에서는 아일랜드 여성들이 신비로운 미녀가 많다고 이야기한다.그리고 타 유럽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러 머리색의 비율이 고른 편이다.
수백 년에 걸쳐 영국의 지배를 받고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기록적인 인구감소를 겪으면서 아일랜드 고유의 언어인 아일랜드어(아일랜드 게일어)를 사용하는 아일랜드인의 숫자는 현저하게 줄었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근대 들어 아일랜드 섬의 기근은 1740 ~ 1741년, 1847 ~ 1852, 1879년으로 총 세 차례 있었다. 그 중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두 번째 기근을 가리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감자는 아일랜드에 보조식량으로 들어왔지만, 차츰 보급이 확대되어 19세기 초에는 주식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기근 당시 300만 명 이상의 아일랜드 사람들이 식량을 감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감자 흉작의 원인은 감자병이었는데, 1845년 감자 생산은 50% 이상 감소했고, 1846년에는 경작지의 3/4에 달하는 감자밭이 황폐해졌다. 1847년 농사는 다소 회복되었으나 경작 면적이 적어서 총 수확량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1848년 감자 농사는 다시 악화되었다.
로버트 필의 보수당 정부는 재앙의 초기에 인도로부터 곡물을 수입하여 이 사태에 대응했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필의 내각은 1846년 물러나고 교조적인 휘그 내각이 들어서게 되었다. 휘그는 처음에 광범위한 공공사업 계획에 의존했지만, 이 정책은 1847년 포기되었다. 1847년 일시적으로 경작이 회복되자, 휘그 행정부는 위기 상황이 끝났다고 보고 자유방임주의에 입각해 모든 구호 계획을 폐지해 버렸다.
식량부족 사태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가 취한 미온적인 태도와 자유방임주의적 입장으로 인해 아일랜드에는 1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아일랜드인들은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기근 중 100만 명이 이민을 떠났으며, 그 후 10년간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계속 이민을 갔다. 따라서 더블린과 벨파스트를 제외한 모든 곳의 인구가 줄어들었다. 대다수의 이민자들이 택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대기근은 아일랜드 역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는데, 이 사건 이후 아일랜드 사람들은 잉글랜드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대기근 5년(1845~1849) 동안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로 곡물의 순수출량이 많았다는 점에 대해 아일랜드인들은 분개했다. 이런 감정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독립의 열망을 부채질하고 20세기에 실현된 아일랜드 독립의 밑바탕이 된다.
또한 미국으로 이주해 온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동포들을 굶어죽도록 그대로 내버려 둔 영국에게 복수를 하려는 증오심에 불타서 아일랜드 전설에 나오는 전사들의 모임인 '페니언'에서 이름을 따온 무장 조직인 페니언 민병대를 만들어, 1866년부터 1886년까지 20년 동안 영국의 영토였던 캐나다로 쳐들어가 영국군을 집요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184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뒬메지트 1세가 아일랜드 농부들을 위해 10,000파운드를 보내겠다고 선언하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술탄에게 1,000파운드만을 보내라고 요청한다. 여왕 자신은 2,000파운드만을 보냈던 것이다. 술탄은 1,000파운드만을 보내는 대신 식량을 실은 배 세 척을 아일랜드로 보냈다. 일설에 의하면 영국 관리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식량선은 항구에 비밀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영국인이 있는 곳에는 항상 아일랜드인이 있다. 주로 영국인들이 식민지 지배 개척 등의 이유로 침략했던 곳에 아일랜드인들도 따라 진출하였다. 그래서 영국계 백인들이 있는 곳에 항상 아일랜드계도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약 4,0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주로 뉴욕 시에 많고 그 다음은 보스턴과 시카고, 그리고 남부 텍사스, 앨라배마, 테네시에도 꽤 있다. 특히 테네시, 버지니아 주, 켄터키 등 구 버지니아 왕령 식민지에는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건너 갔었다.
영국에도 북아일랜드를 포함하여 약 1,400만 명의 아일랜드 혈통이 있다. 그 외 오스트레일리아에도 700만, 캐나다에도 400만 이상의 아일랜드 혈통이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영국계 백인들과 함께 살고 있다.
비 영어권인데 의외로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에도 100만 정도의 아일랜드계가 있다.[6] 그리고 칠레도 아일랜드인 혈통이 어떻게든 꽤 섞였는데 대표적 인물이 칠레 독립 영웅인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그의 성인 오히긴스는 전형적 아일랜드식 성이다. 우루과이에도 아일랜드계가 있다.
그 밖에 옛 영국의 식민지였던 자메이카, 뉴질랜드, 인도, 말레이시아, 홍콩, 싱가포르 등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