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트와 6투멘(북원)
몽골 제국은 내/외몽골과 부랴티아의 부랴트인, 그리고 칼미키야의 토르구트까지 모두가 전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무너진 이후 북원 시대에 몽골은 크게 둘로 양분된다. 일반적으로 몽골과 오이라트로 분리되었다고 하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쿠빌라이계에 충성하는 원(元)조 세력과 반 쿠빌라이계 동맹인 오이라트로 볼 수 있다.
기실 양 집단은 민족적 구성으로는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은 아닌데, 오이라트 역시 원 오이라트 부족에 케레이트와 나이만 등의 부족들이 연합한 부족 연합체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다.
몽골인들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집단이 있었고 쉽사리 통일되지 않았으며 중간에는 오이라트 에센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하는데 이것이 다얀 칸 때에 비로소 6개의 대부락으로 정리 된다, 이 6개의 대부락을 6투멘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 그 구성은 좌현이 차하르, 할하, 우량하이, 우현이 오르도스, 융셰부, 투메드이다. 후일 이들 중에서 차하르가 내몽골의 중심 부족이 되고 할하는 외몽골의 중심 부족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6부족 중 차하르 부족 등은 청나라에 복속되어 만몽 연합 제국 형태로 만주족 즉 여진족들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되고, 이러한 역사가 현대 내몽골의 정체성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내몽골과 달리 오늘날 몽골국인 외몽골은 할하 부족 등이 전신이며 이러한 역사가 마찬가지로 현대 외몽골의 정체성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이 외몽골에는 몽골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남부 부랴트인과 칼미크의 토르구트인도 포함되고 엉뚱하게 튀르크 계통의 투바인도 포함된다.
▣오이라트
오이라트는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했을 시절 서북쪽 끝자락에 살던 산림 부족으로 1207년 칭기스 칸의 몽골 제국에 복종했다.
1368년 원나라가 망하고 난 뒤, 원의 고위 관리였던 몽케테무르는 스스로 오이라트의 수장을 자칭하였다. 몽케테무르가 죽고 나자 마흐무드, 타이핑, 바투볼라드 세 명의 족장이 오이라트를 다스렸다. 그들은 명나라에 공물을 보내며 신속하였고, 명나라 영락제는 1409년 그들에게 왕의 작위를 수여했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엘베크 칸 때부터 북원 보르지긴 왕조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1409년 영락제는 북원의 울제이 테무르 칸에게 복종을 요구했지만 울제이 테무르 칸은 이를 거부하고 다음해 케를렌 전투에서 명군을 무찔렀다. 1402년 영락제가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오자 울제이 테무르 칸은 서쪽으로 도망간다. 이때 오이라트 추장 중 한 명인 마흐무드가 올제이 테무르 칸을 붙잡아 죽였다.
서몽골에는 아리크부케(쿠빌라이 동생)의 후손인 델베그가 있었기에 그가 올제이 테무르 칸을 이어 칸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몽골은 오이라트의 꼭두각시인 새 칸의 즉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르구타이를 중심으로 저항했다. 서몽골(오이라트)과 동몽골(몽골)은 싸움을 계속했고, 명나라는 둘 사이에서 이이제이를 실시해 몽골과 오이라트 사이의 분쟁은 날로 악화되었다.
1408년 마흐무드의 아들 토간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속 아르구타이와 싸웠다. 1437년 토간은 아르구타이와 우구데이계 아자이 칸을 격파함으로써 북원의 보르지긴 왕가를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1438년 토간이 죽자 그의 아들 에센이 군 사령관인 타이시가 되었다.
오이라트는 차가타이 칸국 계열의 모굴리스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에센은 모굴리스탄을 패배시키고 자신을 대군주로 받들게 했다. 에센은 외몽골과 내몽골을 통일시키고 만주의 여진까지 복속시켰다. 오이라트가 점점 커지자 명나라 황제 정통제는 1449년 친히 원정에 나섰으나 오히려 포로로 잡히게 된다(토목의 변). 에센은 악바르진 칸을 살해하고 스스로 칸을 칭하였다. 그러나 곧 오이라트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에센을 몰아냈고, 에센은 자신이 숙청했던 이의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후유증으로 몽골고원은 동쪽의 몽골과 서쪽의 오이라트로 분열했다. 몽골도 이후 차하르와 할하로 분열했다. 그 할하도 할하 좌익, 할하 우익으로 분열됐다. 현재 몽골은 할하부 중심이고 중화인민공화국령 내몽골이 차하르부 거주지였다.
오이라트는 16세기 초반 알탄 칸의 시대까지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유지했고 이슬람 측 기록에서는 모굴리스탄과 카자흐를 수시로 침략했다. 이 탓에 모굴리스탄은 북쪽의 준가르 분지를 상실하였고 준가르 분지는 오이라트의 새로운 본거지가 되었지만, 알탄 칸의 등장으로 오이라트는 몽골고원을 결국 상실하고 몽골에 복속되었다. 알탄 칸의 시대에는 티베트 불교가 오이라트를 포함한 전 몽골에 퍼져 오이라트도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몽골고원 유목민들이 티베트에 개입하는 시초가 된다.
1600년대 초반부터 중가리아에서 오이라트는 부활하기 시작해 일시적으로나마 카자흐스탄 북쪽을 거의 점령하고 트란스 옥시아나 일대와 카스피해 북쪽까지 원정했고 1623년 몽골 할하부를 격파하여 완전한 독립에 다시 성공했다. 그 직후 내분을 겪어 케레이트의 후예 토르구트부가 서쪽으로 이주해 카스피해 북부의 노가이 칸국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삼아 지금의 칼미크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오이라트의 부족 중 코슈트부는 티베트 내전에 개입한 후 이주해 떨어져 나가고 1640년 청의 성장으로 위협을 느낀 몽골과 화의한 후 준가르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최후의 유목제국이라고 불리는 준가르를 세웠다. 예니세이 강에 살던 키르기즈 중 일부가 현재 키르기즈스탄에 거주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준가르와 러시아의 협정이다. 그리고 남은 키르기즈는 하카스인이 되었다.
▣6투멘
북원 대칸 직속의 부족部族은 백여 년의 이합집산을 거쳐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6대 집단을 형성했다. 특히 오이라트 에센의 멸망에서 만돌론이 칸위에 오르는 20여 년 간이 6대 집단 형성에 중요한 시기였다. 만돌론의 시대에 6대 부락은 이미 그 규모를 갖추었으며, 다얀 카안이 만돌론의 사업을 계승하여 6대 부락을 아들들에게 분봉함으로써 제 부락을 자신의 가족 통치 하에 두었다. 이를 6투멘이라 한다.
본래 투멘이란 만호(萬戶)란 의미로, 1만 명의 병력을 공출할 수 있는 집단을 가르켰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부족을 통합한 단위로서 사용되었다. 각 투멘은 여러 오톡(otogh)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개 다얀칸의 6만호는 차하르, 할하, 오량한, 오르도스, 융셰부, 투메드 등을 의미한다. 이 6개의 투멘들의 기원은 모두 몽골 제국기 중앙 정부와 관련이 깊다. 이들은 다시 좌우익 각기 3투멘으로 대별되었다.
좌익 3투멘은 칸의 직접 통치를 받으며, 고비 사막 북동쪽에서 유목하였다.
차하르 투멘은 뭉케 카안이 쿠빌라이에게 준 영지에서 기원했다. 뭉케 사후 몽골제국의 카안으로 즉위한 쿠빌라이는, 이 영지를 망갈라에게 분봉하였으며, 안서왕(安西王)이라 하였다. 본디 섬서 경조(京兆)에 있었으나, 15세기 이후 이동하여 대흥안령 산맥의 서쪽, 지금의 내몽골 우젬칭 인근에서 유목하였다. 이들은 두 형제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었다. 1547년, 알탄 칸의 압박으로 인해 다라이손 칸은 차하르 부락(자신을 따르는 5부 할하)를 이끌고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요하의 상류지역으로 유목지를 옮겼다. 차하르 투멘은 8오톡 차하르라 불리기도 하는데, 각각 아우한, 나이만, 수니드, 우줌칭, 하우치드, 케식텐, 우루드, 마지막으로 차하르 대칸의 개인 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우루드 오톡은, 1622년 반란을 일으킨 뒤 누르하치에게 투항하여 만주 팔기에 속하게되었다.
할하 투멘은 대원 울루스의 오투하(五投下) 가운데 하나인 잘라이르 부의 무할리와 그의 후예들이 지휘하던 엘리트 부대에서 기원했다. 할하라는 이름은 그들이 유목한 할하 강에서 기원했다. 차하르 투멘의 북쪽 인근에 유목했다. 다얀 칸은 다섯째 아들 아르소볼라드와 막내 아들 게레센제에게 할하 부락을 맡겼다. 아르소볼라드의 손자 5명이 그의 부락민을 분봉받았기에 이를 5부(五部) 할하라 불리었고, 게레센제는 아들 7명을 두고 이들이 그의 부락을 나뉘어 분봉받았기에 7부(七部) 할하라 불리었다. 5부 할하는 후일 막남으로 이동하여, ‘내할하 5부’라고도 불린다. 곧 언급될 오량한 부락의 해체 이후 7부 할하는 세력을 서쪽으로 넓혀, 목지가 헨티 산맥에서 항가이 산맥에 이르렀기에 ‘외할하 7기旗’라고도 불린다. 외할하 7기가 현 몽골 공화국의 모태이다.
오량한 투멘은 헨티 아이막에 있는 칭기스 칸의 무덤을 지키던 오량한 부에서 기원했다. 헨티 산맥 인근에서 유목했다. 1538년, 오량한 부락은 반란을 일으켰고, 몽골의 좌 · 우익이 연합하여 이를 격파했다. 몽골의 왕공들에 의해 오량한 부락은 해체되어 다른 부락으로 나뉘어 편입되었다.
우익 3투멘은 오르도스 투메의 수장, 지농Jinong(晋王)의 통치를 받으며, 고비 사막의 남서쪽, 장성을 따라 유목하였다.
오르도스 투멘은 칭기스 칸의 사당을 모시는 역할을 수행했다. 쿠빌라이 칸이 1292년에 만들었고, 그의 손자 카말라Kamala 지농에게 맡기었다. 이후 오르도스 투멘의 수장은 지농이라 칭하며, 칭기스 칸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였다. 13, 14세기에는 막북의 헤를렌 강 인근에서 유목하였으나, 15세기에는 남하, 황하의 굴곡 부에서 유목했다.
투메드 투멘은 튀르크계 옹구트Onggüt 왕국에서 기원하였다. 옹구트 부는 칭기스 칸의 딸 알라카이 베키Alaqai Beki 이래 꾸준히 몽골 카안들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때문에 몽골진(Mongoljin)이라고도 불린다.
융셰부 투멘은 탕구트(서하)의 후신으로, 우구데이 칸의 아들 쿠덴Qödan의 봉지에서 기원하였다. 그 명칭은 쿠덴의 아들 지빅 테무르가 감숙성 우웨이武威에 건설한 영창부永昌府의 명칭에서 기인하였다.
다얀 칸은 차하르 투멘을 중심으로 한 좌익 3투멘은 자신이 직접 통치하고, 고비 사막 북동쪽에서 유목하게 하였다. 우익 3투멘은 오르도스 투멘을 중심으로 편성하고, 그 통치자를 아들 바르소볼로드로 임명하며 지농의 칭호를 주었다. 우익 3투멘은 사막의 남서쪽, 장성을 따라 유목하였다.
이때 나타난 집단의 틀이 지금까지 몽골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원형이 된다. 후일 몽골 고원을 지배하게 된 만청정권은 내몽골을 6개의 맹盟, 49개의 기旗로, 외몽골을 4개의 맹盟, 83개의 기旗로 편성한다. 이 가운데 내몽골의 23개 기旗와 외몽골의 83개 기旗는 다얀 칸의 후예가 통치했다. 내몽골의 나머지 29개 기旗는 칭기스 칸의 아우들의 후예들이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