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닌의 난
오닌의 난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인 오닌 원년(1467년) 1월 2일에 일어난, 쇼군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지방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들이 교토(京都)에서 벌인 항쟁이다. 일본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극상'의 시대였다.
사건의 발생 시점의 연호를 따서 오닌의 난으로 불리는 것이 통상이지만, 주요 사건의 대부분이 분메이(文明) 연간에 걸쳐 있었다 하여 오닌·분메이의 난(일본어: 應仁・文明の亂)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일관성 결여(애초에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했는데 뒤늦게 아들을 얻자 이를 번복한 점)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무로마치 막부의 간레이케(管領家)였던 호소카와 가쓰모토, 요시미를 지지함)와 야마나 모치토요, 요시마사의 아들을 지지함)의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지방의 유력한 슈고 다이묘들도 속속 어느 한쪽에 가담하였는데, 이는 다시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다이묘들의 의도와도 맞물려 있었다.
난은 규슈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막부나 슈고 다이묘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쇼군 가문인 아시카가 가문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목상 존재하고 있었으나 많은 다이묘들, 특히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까지 중국과의 무역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여 화폐의 사용이 늘어나고 상업도시들이 탄생하였으며,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지방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특히 15세기 초의 지진과 기아와 같은 자연재해들은 채무와 조세에 시달린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져 센고쿠 시대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다.
이를 통해 무로마치 막부 체제는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로 전환되었고, 1세기 남짓 각지에서 다이묘들이 서로 항쟁하였다. 또한 주요 전장이 된 교토가 폐허가 된 것을 비롯해 전국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황폐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