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군벌시대
중국의 군벌시대는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국 또는 지방의 일부에 웅거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의 고급 군인 및 그들의 병력을 뜻한다.
신해혁명으로 선통제 푸이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을 때, 그 권력을 차지한 쪽은 혁명파가 아니라 청조 내에서도 수구파였던 위안스카이였다. 그는 탁월한 정치가이자 유능한 관료였지만 공화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다시 황제가 되고자 하는 헛된 꿈을 꿨다. 그의 역량은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각지의 군사 실력자들이 천하 패권을 놓고 싸움을 시작했다. ‘군벌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현대판 춘추전국시대가 재현되어, 각지에 수많은 군벌이 난립하게 되었다.
이 군벌들은 청나라에서 군에 있던 자들, 마적단의 두목, 혹은 마적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자경단의 리더 등 출신도 다양했으며, 특정 군벌이 어떤 영역을 지배한다 해도 그 안에는 수많은 소군벌들이 그 군벌의 아래 속해 있는 봉건적인 구조였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무수한 분쟁이 있었다.
국민당을 창립한 쑨원은 중국을 통일하고 근대적인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에 일평생 헌신했다. 쑨원은 혁명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군벌들이 지배하는 중국의 현실은 그의 이상과 너무나 멀었다. 쑨원은 무수히 많은 봉기를 일으키고 북벌전쟁을 선포했지만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는 군사적 역량도, 자원도 부족했다. 심지어 천중밍 같은 군벌에 의해 그의 근거지인 광둥성에서조차 쫓겨날 정도였다. 국공합작을 통한 소련의 원조가 아니었다면 쑨원은 그의 뒤를 이어 장제스가 북벌을 완수할 물적 기초를 닦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반면 무명의 군인이었던 장제스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방을 무력으로 평정해 국민당의 근거지를 확고히 했고, 북방 군벌들 간의 분열을 이용해 단기간에 북벌을 성공시켰다. 1926년 북벌이 개시될 때 국민군은 병력이 8만 명에 불과했으나 북방의 군벌들은 100만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경제력, 군비, 장비, 무기 생산 측면에서 북양군벌들은 압도적이었다. 장제스는 1년 안에 북벌 승리를 장담했으나 남들 눈에는 터무니없는 허세로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북벌은 단순한 통일전쟁이 아니라 혁명전쟁이었고,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북벌군을 지지하고 협조했다. 무엇보다 북벌군은 강한 군대였다. 장제스는 여러 차례의 군사적 패배, 정지적 하야, 배신과 음모 등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북방의 군벌들을 차례차례 꺾어갔다. 장제스는 마침내 동북왕 장쭤린을 베이징에서 몰아내고 1928년 6월 북벌 종료와 국가 통일을 선포했다. 북벌에 나선 지 1년 11개월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