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칼미크 공화국(또 하나의 몽골)

frog.ko 2020. 10. 21. 15:20

아시아인들과 꼭 닮은 칼미크 민족이 인구의 반을 이루고 있고 독특한 동양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러시아의 아시아'로 불리는 곳. 이곳이 바로 러시아의 칼미크 공화국이다.칼미크인들은 반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 계통의 오이라트부족이다.

 

원래 중국 중서부에 거주하던 민족 이었는데 15세기 초에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목초지가 풍부한 이곳에 정착한 후 현재까지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십 수만에 달하던 이들은 칼미크 한을 세우기도 했으며 1771년에 러시아에 멸망당했고, 이 지역에 러시아인 및 독일인들이 많이 와서 거주하게 되었다.

 

칼미크 자치주는 1920114일에 성립되었고 다른 러시아지역에 살던 칼미크인들도 칼미크자치주로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다. 이 지역은 1958년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으나, 칼미크인들이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면서 자치 지역은 해산되었.

 

흐루쇼프에 의해 귀향을 허락받아 1957년에 자치주가 회복되었다가 1958년에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원래 이 지역은 노가이 칸국의 영토였으나 준가르 지역에서 이주해온 토르구트인들이 코사크들과 힘을 합쳐 이들을 밀어내고 칼미크 칸국을 세웠다. 이슬람측 사료와 러시아 측 사료는 이들 오이라트인들을 칼미크 혹은 깔무끄라고 칭했다.

 

이후 건륭제 때 청나라가 준가르 절멸을 실시하면서 토르구트부를 제외한 준가르의 오이라트인들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현재 칼미크인들은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준가르족의 후손들이기도 하다.

 

카스피해에 정착한 칼미크 칸국도 마냥 평화롭지는 못했다. 애초에 카자흐족들을 꾸준히 약탈하고 다녔는데 예카테리나대제는 러시아 영내의 칼미크 칸국 영토를 축소시킬 계획을 세운다.

 

러시아의 간섭이 점점 심해져서 이들 칼믹에게 러시아 법률을 적용하고 소금 생산과 민물 어업권까지 제한하니 먹고 살 방도가 힘들어졌다독실한 라마 불교의 신자들인 칼믹들에게 강압적으로 러시아 정교를 믿도록 해대는 전도도 일종의 모욕이었다.

 

이런 귀향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때 칼믹에게 여러 가지로 제약을 가하던 러시아가 이들 몽골 인들에게 살던 지역을 떠나서 타지로 이동하라는 결정타적인 명령을 내렸다더구나1761년 러시아,독일,우크라이나인이 이주하여 황무지로 쫒겨나게 되었다.여기에 러시아는 말 잘타는 칼믹에게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에 부족이 감당하기 힘든 많은 수의 기병들의 차출과 참전을 요구했다.

 

때 맞춰 준가리아가 건륭제에게 멸망하고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1770년 러시아에 동원되어 오스만 터키와 전투를 겪고 돌아온 칼믹의 족장 우바시 칸은 여러 부족의 원로들과 상의를 거듭해서 다음 해 초에 볼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 가기로 했다. 러시아로서 다민족 지대인 러시아 남부에서 칼믹들이 러시아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고 마음대로 러시아를 떠나는 것은 타민족을 자극하는 행위였다.

 

우바시 칸은 러시아를 속이기 위해서 성동격서의 전법을 썼다.러시아에게는 평소 칼믹 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카자크를 손보기 위해 이동한다고 둘러댔다. 출발전날에 이동을 한다고 발표하고 볼가강 동안으로 모이기로 하고 1771 1 5일 새벽, 볼가 강 동쪽 연안에 토르구트인 33,000가구17만 명이 집결했다.

 

이들 엑소더스의 원정대는 같은 몽골인들인 호슈트 인, 초로스 인, 그리고 코히토 인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볼가강 건너에 살던 일만 여 가구 6-7만명의 토르구트족·도르베트족·부자와족들은 비밀 회의에서 이 귀향 엑소더스에 참가하지않고 그냥 그 땅에 눌러서 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엑소더스에 동참하지 않은 구실로서 그 해 따라 온난해진 날씨 때문에 얼지 않은 볼가강의 도강이 불가능하여 도강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이들 귀향길에 오르지 못한 볼가 강 서안(西岸)의 도르베트인 후손들이 형성한 오늘날의 칼믹공화국의 국민이 된다.

 

한편 우바시 칸은 고향으로 가는 최단거리를 택했다.우바시 칸은 고향으로 가는 최단거리를 택했그것은 사이가 안 좋은 카자크족과 키르키즈 족이 다스리는 영토였다. 결국 수백, 크게는 수천의 집단이 따라오지도 못하고 러시아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또 적에게 투항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냥 증발하기도 했다.

 

기아와 상처투성이의 만신창이가 된 토르구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추적과 도발을 뿌리치고 동진(西進)에 동진을 되풀이 한 끝에 7개월 뒤에 준가르 지방 일리 강 유역에 도착했다볼가 강 유역을 떠났던 17만 명의 부족민중 일리 강 상류에 도착했던 것은 절반도 안 되는 7명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날 토르구트 족의 후손들은 우루무치 서북쪽 자치주에서 살고 있다.

몽골어의 언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