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88

이탈리아 제국주의

1936년부터 1941년까지이탈리아 식민 제국은 19 세기에 아프리카 에서 설립 되었으며 왕국 의 식민지 , 보호령 , 조계지 및 종속국 으로 구성되었다. 이탈리아 . 아프리카 의 식민제국 에는 현재의 리비아 , 에리트레아 , 소말리아 , 에티오피아 영토가 포함된다. 아프리카 외부에서 이탈리아는 도데카네스 제도 ( 이탈로-투르크 전쟁 이후 ), 알바니아( 1917~1920 및 1939~1943 )를 소유했으며 텐진을 포함하여 중국에서 일부 양보를 받았다 . 1922년 이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의 지도 하에 정권을 잡은 파시스트 정부는 이탈리아 제국의 규모를 늘리고 체계적인 " 인구학적 식민지화 "를 장려했으며 1939년까지 이탈리아 정착민의 수는 이탈리아 리비아에서 120,000-150,000, 이탈..

세계역사 2023.10.05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사크인

우크라이나인이란 동슬라브계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슬라브 민족을 말한다. 혈통상으로는 동슬라브족에 속하고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루신인과 매우 가깝다. 우크라이나라는 말은 근세에 생긴 어휘이며, 중세에는 루테니아인(Ruthenians)이라는 말로 더 자주 칭해졌다. 슬라브인, 그리고 동슬라브들의 기원 지역이 우크라이나 현 영토와 상당히 겹치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슬라브족과 기원전부터 이곳에 정착해서 살던 선주민족인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알란인 등 이란계-투르크계 유목민족들이랑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고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은 러시아군의 정예 경보병이나 기병으로 복무하며 시베리아 진출과 캅카스, 중앙아시아 정복에 공헌하였다. 캅카스와 시베리..

세계역사 2023.09.08

금나라(1115년 1월 28일 ~ 1234년)

금나라는 1115년, 현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걸쳐 살던 여진 부족 완안부의 족장 아골타에 의하여 세워졌다. 구전에 의하면 아골타는 완안 함보의 후손이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여진족들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시기에 한족들은 거란족들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잡혀가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나라와 적대 관계였던 송나라는 이를 크게 반겼다. 1121년, 송나라는 금나라와 해상의 맹약을 맺어 함께 요나라를 무너뜨리기로 합의하였고, 곧바로 합동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송나라 군대가 요나라에 맞서 고전하는 와중에,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에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결국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 조정을 중앙아시아로 쫓아..

세계역사 2021.12.24

몽골인

몽골인은 몽골 국적을 가졌거나, 몽골을 모국으로 인식하거나, 혈통적으로 몽골계인 민족을 일컫는 말. 몽골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는 기준으로 보면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사는 내몽골인도 몽골인에 포함되며, 혈통적으로 몽골과 같은 러시아의 부랴트인, 칼미크인, 투바인들도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몽골계 민족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한국인은 몽골족을 하나의 종족(Ethnic Group)으로 여기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통일 영웅으로 불리는 칭기즈 칸이 통합한 나이만, 타타르, 케레이트 등은 실제로는 몽골족이 아니라 몽골계 언어를 사용하는 유목민일 뿐이었고, 이후에 몽골로 편입된 위구르족, 캉글리, 킵차크, 거란족, 탕구트 등도 이 당시 정(正) 몽골인으로 분류된 니룬(귀족), 두릴..

세계역사 2021.11.25

네르친스크 조약

네르친스크 조약은 시베리아 자바이칼 지방 네르친스크에서 1689년 8월 27일 청 제국과 러시아 차르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러시아는 이반 4세가 16세기 중엽에 돈 코작의 추장인 에르마크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경략하게 하면서부터 아시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 뒤 17세기에는 헤이룽 강 연안에서 네르친스크 성을 쌓고 남하하고자 하였다. 이에 청의 강희제는 청나라의 발상지인 만주를 보호하려고 러시아의 남하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서(1689) 스타노보이 산맥으로 국경을 정하였다. 그 뒤 러시아는 다시 몽고 방면으로 남하를 꾀하였으나, 청은 역시 캬흐타 조약(1727)을 맺어서 이를 저지시켰다. 러시아는 청의 힘에 부딪혀 남하할 수 없게 되자, 다시 동쪽으로 진..

세계역사 2021.10.20

아프가니스탄 역사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아시아 중앙부에 걸쳐 있는 내륙국이다.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화인민공화국,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카불이다. 다민족 국가로서 주류 민족인 파슈툰족을 비롯해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베크인, 아이마크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는 약 3,494만 명('18)이며 면적은 652,000㎢로 한반도의 3배에 이른다. 아프가니스탄은 역사적으로 중동과 아시아의 여러 지역의 문화가 만나는 곳이었으며 여러 세기를 거쳐 다양한 민족들의 고향이 되었다. 전략적인 위치로 인해 수많은 군사 활동이 이루어진 곳이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정복 세력으로는 알렉산더 대왕, 이슬람 제국, 몽골 제국, 대영제국, 소련, 그리고 현대의..

세계역사 2021.08.16

총살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로마노프가는 1613년부터 1917년까지 304년 동안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조이다. 미하일 1세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 이어졌다. 시조는 러시아계가 아닌 독일의 올덴부르크 지방의 귀족,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로 14세기 무렵, 현재의 프로이센 지역에 위치한 튜튼 기사단국에서 러시아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대내적인 전제 정치와 대외적인 팽창 정책을 통해 강력한 전제 군주로 군림했던 이반 4세가 죽자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귀족들 간에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동란 시대) 한동안 혼란이 거듭되다가 1613년 러시아 전국회의에서는 이반 4세의 아내 아나스타샤의 가문인 미하일 로마노비치를 새 황제로 선출하였는데,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이다. 이반 4세가 초안을 잡은 대내외 정책을 이어받음과 더불..

세계역사 2021.07.09

크메르 제국

크메르 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존속한 힌두교/불교 제국이다. 크메르 제국은 푸놈 왕국이나 첸라 왕국 등을 흡수하면서 힘을 키워나갔으며, 국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에는 동남아시아 반도 대부분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거나 봉신국으로 거느렸으며, 전성기 시절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중국의 윈난성, 서쪽으로는 베트남, 남쪽으로는 미얀마까지 닿았다. 크메르 제국의 시초는 진랍 왕국으로, 본래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550년에 부남으로부터 독립하여 역으로 부남을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1세가 죽고 난 뒤 후계자가 없자 706년 수진랍과 육진랍으로 분열되었다. 크메르 제국의 창건자인 자야바르만 2세는 본디 첸라 왕국 출신이다. 그러나 첸라 왕국의 국왕이었던 라젠드라바르만 1세가 자바 섬의 사..

세계역사 2021.06.06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플 '테오도시우스 성벽'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서기 330년 5월 11일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래, 1,100년 넘게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그 번영과 로마 제국 황제 타이틀을 노리고 수많은 세력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리던 이들은 도시를 지켜주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에 번번히 막혔다. 1204년 4월 8일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서 무적 신화는 깨어졌다. 총 20회의 공략 시도가 있었으며, 1453년 5월 29일 최종적으로 성벽을 돌파한 오스만 베이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나긴 공방전 역사에 종지부를 찍았다. 콘스탄티노플 성벽(Walls of Constantinople)은 테오도시우스 2세(T..

세계역사 2021.06.03

로마의 수도교

로마 제국은 머나먼 수원지에서 도시나 마을로 공중목욕탕, 공중화장실, 분수, 사유지에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다양한 수도교를 지었다. 또한 농장이나 정원에 공급되었고, 사용하고 남은 물은 하수처리를 위한 복잡한 하수도를 통해서 오수와 폐수등을 배출하였다. 수로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물을 흘려서 공급하였다. 경사도는 평균 0.2~0.5%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16.5%가 되었는데, 공사지역의 기후와 특성에 따라서 돌과 시멘트를 사용한것과 벽돌을 사용한 것도 있다. 언덕이 그리 넓거나 크기 않다면, 갱도를 파고 들어가 관통하는 방법을 택했고 일정한 간격으로 언덕에서 수직으로 굴을 파서 수리구멍과 환기구를 만들었다. 골짜기가 나오면 다리를 놓거나 사이펀 원리로 밑을 파고 들어갔다. 로마의 첫번째 수로는 ..

세계역사 2021.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