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경제, 종교가 만났을때
1517년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에 붙였을 때 그가 분개한 것은 카톨릭의 면죄부 판매였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통치 아래에 있었으며 교황청은 성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위 면죄부(indulgence)라는 것을 판매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독일 경제계를 쥐고 있었던 가문은 푸거(Fugger) 가문이었다. 푸거 가문은 14세기말부터 16세기말까지 약 200년 동안 정경유착, 독점과 착취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 가문이었는데, 그의 재산은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메디치 가문의 5배가 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푸거 가문이 활동했었던 신성로마제국은 쿠테타를 통해 왕이 된 프랑크왕국의 황제 피핀의 아들이었던 카를로스가 서기 800년 교황 레오3세에게 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으며 출현하였으며, 카를로스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프랑크왕국이 독일(동프랑크), 프랑스(서프랑크), 이탈리아(중프랑크)로 나뉘어진다.
신성로마제국 중에서 독일 지역은 50개가 넘는 자유도시(free city)들을 군소 영주들이 다스리며 거의 완벽한 자치 상태를 누렸는데, 이러한 자유도시는 1871년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자유도시들은 외국에서 장사를 할 때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일종의 연합국가 같은 것을 조직했는데, 그것이 바로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었다. 한자동맹을 대표하는 도시로 북부의 뤼베크, 함부르크와 브레멘, 중부의 프랑크푸르트와 쾰른, 남부의 뉘른베르크와 아우크스부르크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아우크스부루크는 한자동맹의 최고 실력자였던 푸거(Fugger) 가문의 본부로 유명했다.
푸거 가문은 낭비벽이 심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왕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이었던 막시밀리언이 장가를 갈 때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주면서 그 댓가로 은광, 동광 등 엄청난 이권을 챙기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푸거 가문은 노예무역에도 개입하는 등 닥치는 대로 돈을 모았고 당시 막대한 부를 등에 업은 푸거의 위세는 너무나도 대단했다. 푸거에 필적할 만한 상인은 유럽 내에 존재하지 않았고 유럽의 각종 상인들은 물론 공공기관, 영주들, 교황청은 모두 유럽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푸거의 지점들을 활용해 금전거래와 물품거래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부를 확장하던 푸거 가문은 로마 교황청과도 협약을 맺었는데, 바로 그것이 면죄부였다. 즉, 푸거 가문은 교황청을 대신해서 면죄부를 팔고 그 수익금의 30%를 교황청이 가져가는 협약이었다. 이처럼 푸거 가문은 교황청과의 은밀한 거래를 통하여 가문의 영향력과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푸거 가문의 위기, 그들의 위선된 행동은 비단 면죄부 판매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푸거 가문의 위기는 아주 가까운 데서 시작되었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뿌리면서 종교개혁을 들고 나왔을 때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돕던 푸거 가문은 졸지에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공교롭게도 루터는 푸거 가문의 독점으로 신음하던 광부의 아들이었다. 마인치 대주교가 면죄부 판매에 그토록 열을 올렸던 이유가 바로 푸거 집안에서 빌린 돈을 갚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루터는 푸거를 교황과 한 통속이라고 비난했다. 루터는 푸거 가문을 "도둑이나 강도보다 더 지독하다"고 비난했다.
결국 민심은 돌아서 농부와 수공업자들은 푸거 가문에 쌓인 불만을 드러냈고 기사계급과 귀족 중에서도 이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 푸거 가문의 사업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으며 16~17세기 그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임) 영국과의 해전에서 진 뒤 스페인왕국은 빚더미에 올라 파산해버렸는데, 그들에게 빌려준 돈을 몽땅 날린 푸거가문은 재정에 결정타를 맞고 1658년 결국 사업이 해체되고 만다. 그의 화려했던 부도 종교개혁과 더불어 사라지면서 결국 푸거(Fugger)는 베거(Beggar:거지)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