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포르투갈과는 역사적으로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고대부터 스페인 지역과 포르투갈 지역에 이베리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뒤 켈트족과 혼혈화되면서 켈트-이베리아인들의 땅이 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에게 병합당했다. 이 당시에 스페인 지역은 히스파니아, 포르투갈 지역은 루시타니아라고 불렸다. 이때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로마화되고 언어도 라틴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서로마, 서고트, 동로마의 지배를 거쳐 711년부터 서고트 왕국은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해 멸망당한 뒤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슬람에게 대부분의 이베리아 반도가 정복당하고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만 소왕국들이 난립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레콩키스타로 아랍의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에 항거한 뒤 점진적으로 아랍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랍 이슬람 세력들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 각각 가톨릭을 국교로 하는 기독교 왕국들이 생겨났고 레온 왕국의 봉신이었던 포르투갈 백작령이 지금의 포르투갈의 기원이다.
처음엔 백작령이었지만 점차 세력을 확장해서 독립하여 포르투갈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 아라곤들과 함께 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벌여 1249년이 되어서는 현재의 영토를 형성하게 되지만 카스티야는 계속해서 포르투갈을 넘봤고 한차례 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위협을 무산시킬 수 있었다.
당시 카스티야는 레콩키스타가 끝나지 않아 남쪽의 그라나다 왕국이 건재해 있었기 때문에 온전히 포르투갈에 집중할 수 없었다. 덕분에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대항해시대를 맞아 포르투갈 역사에 다시 없을 전성기를 맞는다.
근데 문제는 옆나라인 스페인도 동시기에 전성기를 맞는 다는 것이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합병하여 스페인을 이루고 그라나다 왕국까지 멸망시키고 신대륙 발견을 통해 쏟아지는 귀금속으로 순식간에 유럽의 최강대국이 된다.
이 와중에 카를5세가 등장했다. 당시 유럽왕실은 나라간에 결혼으로 따져보면 다들 서로 친인척사이로 후계가 없을 경우 한명의 왕이 여러나라의 왕이 되는 사태도 종종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카를5세는 전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최고의 상속을 받게 된다.
플랑드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부르고뉴 왕국과 네덜란드를 물려받은 후 스페인을 물려 받으며 최초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왕이 된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 영지까지 물려 받으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거기다 이탈리아를 두고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승리해 이탈리아까지 손에 넣습니다. 한 50년을 두고 프랑스와 싸웠는데 이탈리아는 초토화되고 아예 몰락해버렸다. 대항해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전쟁무기를 만들던 것과, 밀라노공국이 갑자기 없어져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메리카대륙에서부터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과 필리핀까지 모두 그의 영토였다. 교황은 카를5세의 힘이 너무 커지자 카를5세를 상대로 십자군을 결성한다. 프랑스와 베네치아 이탈리아 소국들이 동맹을 맺자 분노한 카를5세가 그대로 로마로 쳐들어가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을 감옥에 가둬버렸다. 결국 교황은 반성문을 쓰고나서야 풀려났다.
이후 카를5세가 죽으면서 제국을 둘로 나눠 스페인과 나폴리왕국은 아들에게 신성로마제국은 동생에게 나눠준다. 네덜란드는 덤으로 아들에게 줘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다. 또 군데 군데 프랑스 내의 합스부르크 영토들도 아들에게 물려줘서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됐다.
이처럼 당시 유럽의 최강대국이었던 스페인에게 포르투갈은 좋은 먹잇감이었고,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틈타 한차례 전쟁일 벌인 후 포르투갈을 병합한다.
한 때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으며 전세계를 스페인과 양분했지만 뜬금없이 나라가 사라진 것이다.
포르투갈은 동군연합으로서 자치권을 부여받긴 했지만 이때는 스페인의 위세가 전 서유럽을 휘감던 최강의 시기였으므로 비중상 카스티야와 아라곤보다 아래에 위치했고 이 시대는 스페인의 황금기라고 칭해진다. 이 때는 남아메리카 전체가 스페인의 것이었다. 이 동군연합의 판도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며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의 포르투갈 무역소들이 이베리아 연합의 지배하에 있었다.
문제는 외교권을 상실한 것이다. 포르투갈은 스레인의 대외정책을 따라가야 했다. 스페인의 해외통치기구인 인도 위원회(Council of the Indies)에 포르투갈인이 스페인인과 동수로 참여했지만 주도권은 스페인 사람들이 쥐었다.
이러한 병합은 유럽 각국의 분노를 샀는데, 안그래도 신대륙과 인도에서 얻는 엄청난 이득을 겨우 두나라가 독점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한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 와중에 네덜란드의 독립투쟁은 기름에 불을 끼얹졌다.
당연히 프랑스와 영국은 네덜란드를 지원했고, 특히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대놓고 해적질을 하며 스페인을 자극해 유명한 아르마다 즉 무적함대를 통해 영국을 점령하려 했지만 해적출신의 영국 제독 드레이크의 맹활약으로 영국을 구해냈다.
스페인은 이 영국-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쏟아내면서 지금의 벨기에를 지켜내지만 결국 네덜란드는 상실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와도 전쟁중이었던지라 그야말로 사방에서 싸우고 있었다.
스페인의 적은 포르투갈의 적이 되었다. 오랜 우방이었던 영국이 포르투갈에 등을 돌렸고, 독립전쟁 과정에 스페인과 싸우고 있던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식민지를 공격했다.
이미 기울어가고 있던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은 스페인과 단일 국가를 형성한 이후 급격히 무너져 갔다. 이베리아 연합왕국(Iberian Union)에서 스페인은 자국 식민지 방어에 주력했고, 그 사이에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가 포르투갈 식민지를 잠식해 들어갔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과의 전투에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편에서 싸워야 했다. 영국이 스페인 해군을 제압한 이후 포르투갈 영토를 넘보았다. 페르시아만의 포르투갈 식민지 호르무즈(오만)가 현지 왕국의 공격을 받을 때 영국 해군은 이슬람 공격자를 도왔다. 영국은 또 대서양 상에 있는 포르투갈령 아조레스 군도도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를 만들어 브라질과 인도, 동아시아, 앙골라 등 포르투갈 식민지 전지역을 상대로 공격을 감행했다. 서인도회사는 브라질 북동부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네덜란드령 브라질은 1630년에서 1654년까지 24년간 지속되었다.
아시아에서 네덜란드는 실론(스리랑카)에 기지를 세우고 인도 해안에 있는 고아 등 포르투갈 요새를 공격했다. 향료 무역의 거점인 인도네시아 암본은 포르투갈이 영향력을 상실한 사이에 네덜란드의 차지가 되었다. 서아프리카 앙골라에서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루안다를 점령했다. 일본의 교역창구인 데지마(出島)도 네덜란드에게 넘어갔다.
포르투갈의 향료 무역은 네덜란드에, 노예무역은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무너졌다. 포르투갈 귀족과 부르조아들 사이에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갔다.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전쟁을 지원하는데,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전쟁을 도와주지 않았다. 해외 요새가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상업은 위축되어 갔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적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1621년 펠리페 2세가 죽고 펠리페 3세가 연합왕국의 국왕이 되자, 포르투갈의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펠리페 3세는 포르투갈에 전왕과 다른 정책을 폈다. 그는 그나마 남아 있던 자치권을 빼앗았다.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세금을 중과하고 스페인 의회(코르테스)에서 포르투갈 귀족들의 지위를 발탁했다.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은 스페인 귀족들이 차지했다. 필리페 3세는 포르투갈을 스페인 왕국의 한 지방주로 격하시키려고 책동했다.
그러자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내쫓고 포르투갈 독자적인 왕을 세우자는 음모가 1640년에 생겼다. 음모자들은 40명을 규합하고 매국노로 찍은 국무장관 미겔 데 바스콘셀로스를 살해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스페인 왕가를 내쫓기로 했다.
그들은 때를 기다렸다.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펠리페의 군대가 30년 전쟁에 참여해 파병하는 힘의 공백기가 찾아왔다.
30년 전쟁: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
1640년 12월 1일 오전 9시, 40명의 가담자들은 포르투갈 궁전으로 몰려가 바스콘셀로스를 죽이고 포르투갈 총독을 맡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만투아 공작녀 마르가레트(Margaret)에게 리스본에 주둔한 스페인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작전은 계획대로 성공했다.
그들은 궁궐 베란다에 나와 리스본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리스본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귀족들도 혁명에 동조했고, 젊은이들은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자원입대했다. 주동자들은 브라간사 공작(Duke of Braganza) 주앙을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주앙 공작은 주앙 4세로, 제4왕조 브라간사 왕조(dynasty of Braganza)를 열게 된다. 이 왕조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270년간 16대를 이어간다.
그리고 당시에 포르투갈이 지배했던 세우타는 포르투갈 측이 스페인에 양도했다. 이베리아 연합에서 포르투갈은 독립했지만, 결국 쇠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도 이후에는 쇠락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한 지방인 갈리시아어는 스페인어보다 포르투갈어랑 굉장히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