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0년 대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슬란은 쿠르드족과 그의 투르크계 연합의 동맹자들을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로 이주시켜 정착하기 시작했다.
알프 아슬란 (1029년 1월 20일 ~ 1072년 12월 15일) 은 왕조명의 기원이 된 셀주크의 증손자이자 셀주크 제국의 두 번째 술탄이다.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부터 무함마드 빈 다우드 차그리라는 이름을 쓴 것 같다. 그리고 그의 군사적 기량과 개인적인 용기, 탁월한 무예 덕분에 튀르크어로 “영웅적인 사자”라는 의미의 알프 아슬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059년, 그는 호라산 총독이였던 아버지 차그리 벡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그의 숙부 투으룰 1세가 죽자 알프 아슬란의 형제 술레이만이 그의 지위를 계승했다. 알프 아슬란과 그의 숙부 쿠탈미쉬는 각각 자신이 토그릴의 지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64년 4월 27일, 알프 아슬란은 쿠탈미쉬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대 셀주크의 술탄이 되었다. 그의 페르시아 술탄국은 아무다리야 강에서 티그리스 강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다.
그의 제국을 더욱 강하게 하는 동시에 제국 내의 파벌들을 제어하기 위해 그는 페르시아인 재상 니잠 알물크를 기용했다. 니잠 알물크는 무슬림 역사에서 가장 유능한 정치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제국 내의 분란을 수습한 그는 회의를 소집해 그의 아들 말리크 샤 1세를 상속인이자 계승자라고 선언했다. 위대한 교회 중 하나인 카파도키아의 수도, 카이사레이아에 있는 성 바실 성당의 보물을 약탈하리라는 희망과 함께 그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그 도시를 약탈했다. 1064년, 그 뒤에 그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로 진격하여 정복했다.
1068년, 시리아로 진격하는 와중에 오우쉬가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했다. 황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가 직접 이끄는 군대가 실리시아에서 침략자들과 마주쳤다. 세번의 전투 중 처음의 두번은 황제가 직접 지휘했고, 세 번째 전투는 마누엘 콤네노스 (마누엘 1세 콤네노스의 종조부) 가 이끌었다. 1070년 튀르크인들은 패주해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으로 퇴각했다. 1071년 로마누스는 쿠만인과 프랑크인, 바이욀의 루셀이 이끄는 노르만인로 이루어진 약 3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다.
반 호 북쪽의 만지케르트에서 로마누스는 알프 아슬란의 군대와 마주했다. 술탄은 황제에게 평화 조약을 제안했으나, 황제가 거절함으로 만지케르트 전투가 시작되었다. 쿠만 용병들은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제국을 배신하고 튀르크군에 가담했다. 또, “서방의 용병들은 전투를 회피했다.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었다.” 로마인의 군대는 궤멸당했다.
로마누스 4세 황제는 생포되어 알프 아슬란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황제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며 평화 조약을 맺을 것을 제안했고, 황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프 아슬란의 승리는 근동의 힘의 균형을 순니파 무슬림과 셀주크 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돌려났다. 비록 비잔티움 제국이 4세기 더 살아남았고, 십자군이 때때로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만지케르트는 아나톨리아에 대한 튀르크 정복의 시작을 의미했다.
만지케르트 이후 다수의 투르크 부족의 군인과 정착자들이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밀어닥치게 만들었으며,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역을 산산조각 내면서 많은 영토를 점령했다. 알프 아르슬란의 정복은 십자군의 주요한 원인이 됐다.
이후 제국을 이어 받은 셀주크 제국의 말리크샤 1세의 먼 친척인 쉴레이만 이빈 쿠탈미쉬가 1070년대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점차 세력이 강성해져 1075년 비잔티움 제국령인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를 점령했다. 2년후 그는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술탄을 선포하고 이즈니크에서 자신의 술탄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쿠탈므쉬의 아들 쉴레이만였다. 그는 소아시아에서 권토중래를 노렸다. 1081년 니케아를 비잔틴 제국에서 얻어낸 쉴레이만은 그 곳에 수도를 세웠다.
1086년 쉴레이만은 시리아의 술탄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킬리지 아슬란 1세는 포로로 잡혔다. 1092년 말리크샤가 죽자 풀려난 킬리지는 아버지의 영토에 자신의 술탄국을 재건하였다. 그 후 킬리지는 제1차 십자군에 밀려나 남서 아나톨리아로 물러났고 니케아를 수도로 삼았다. 1107년 그는 동쪽으로 원정을 떠나 모술을 점령했지만 그 해 죽었다.
킬리지의 아들 마수드 1세의 치세 동안 룸 술탄국은 중앙 아나톨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고 위세를 떨쳤다. 룸 술탄국은 그 이후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에 맞서 아나톨리아를 약 200년 동안 지배했으며 흑해연안까지 진출했다.
룸 술탄국은 셀주크 제국의 유력한 후계국가였으며 13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발흥하자 소멸하고 말았다.
룸이란 단어는 페르시아어로 로마를 뜻하는데 이는 아나톨리아 지방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왔기 때문에 붙여졌다.
룸 셀주크는 튀르크계 왕조 국가로 11세기 말부터 1308년까지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지배했다. 본래 수도는 니케아였지만, 1097년 제1차 십자군에게 니케아를 빼앗긴 뒤로는 이코니온에 수도를 두었다.
12세기 후반 클르츠 아슬란 2세 치하에서 세력이 크게 신장되어 소아시아에서 무슬림 튀르크계의 지도적 위치를 확립했다. 13세기 전반에는 케이휘스레브 1세, 케이케부스 1세, 케이쿠바드 1세의 치세기는 룸 셀주크 왕조의 최대 전성기였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제군주적이고 무능했던 그야스엣딘 케이휘스레브 2세(재위: 1237년 ~ 1243년)의 시대에 룸 셀주크 왕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240년에 튀르크멘이 일으킨 바바이 반란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룸 셀주크 왕국이 이로 인해 약해지자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몽골 제국에 종속하게 되었고, 이후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14세기 초에 소멸하였다.
1277년 이후 몽골인들은 소아시아의 행정을 장악했다. 튀르크멘들은 몽골의 압제에서 도주하고자 서쪽의 비잔틴 변경을 침공하고 정복하여 소규모 국가를 세웠다. 남쪽 해안가에는 안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테케 공국이 성립했다. 테케의 북방 내륙 지대에는 이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하미드 공국과 퀴타히야를 수도로 둔 게르미얀 공국이 생겨났다. 에게 해에 면한 지역에는 멘테셰 공국이 있었고, 거기서 북쪽으로 가면 티레와 마니사를 각각 수도로 둔 아이든 공국과 사루한 공국이 존재했다. 사루한의 북쪽, 다르다넬레스 해안에는 카레시 공국이 세워졌다. 마지막으로 카레시 공국의 서북쪽의 옛 비잔틴 제국령 비티니아에는 오스만 공국이 생겨났다. 이 오스만 공국은 후일 오스만 제국으로 진화하게 된다.
룸 셀주크 치하에서 소아시아는 이슬람화와 튀르크화의 과정을 겪었다. 룸 셀주크를 방문한 생캉탱의 시몬이 이 나라를 터키라 부른 것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이 기록은 터키란 용어가 사용된 가장 초기의 용례에 속한다. 이는 본래 그리스와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비잔틴 제국의 소아시아가 무슬림과 튀르크적 요소를 다수 함유한 아나톨리아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바이다.
사료들에서는 룸 셀주크라 기록되었다. 1246년 경 이 지역을 방문한 생캉탱의 시몬은 룸 셀주크를 터키라고 칭했다. 현대 터키에서는 아나톨리아 셀주크 또는 터키 셀주크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