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마그 몽골
카마그 몽골은 몽골 제국의 원류이다.
동호족의 갈래인 몽올실위로부터 유래되었으며 10세기경부터 1206년 몽골 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케룰렌 강 유역을 중심으로 몽골 고원에 존재한 부족 연합체다.
연합되지 않은 부족단위로 흩어져 요나라, 금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하면서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였으나, 종래에 테무친이 카마그 몽골을 재통일하고 카간에 즉위, 칭기즈 칸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이후 다른 몽골 부족들을 평정하고 제국건설의 기틀을 마련한다.
내부적으로는 키야트, 타이치우드, 잘랴르, 주흐킨의 4개 핵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이만, 타타르, 케레이트, 메르키트와는 다소 원류가 이질적으로 적대와 동맹을 반복하며 공생관계에 있다가 칭기즈 칸에 이르러 복속시킨다.
▣메르키트
메르키트의 기원은 몽골화된 튀르크계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몽골 초원 중 오콘강 하류에서 셀렝가 초원에 이르는 지역이 그들의 근거지였다. 이곳은 지금의 부랴트이다.
12세기 중반 카마그 몽골의 카간 예수게이는 메르키트족 출신의 남편 칠레두와 함께 시집으로 가던 울구누트 족의 여인 호엘룬을 납치해서 자기 아내로 삼아 테무진을 낳는데, 거꾸로 테무진은 아내 보르테를 메르키트 족 칠게르에게 한동안 빼앗기고, 이 일은 향후 몽골 제국의 대칸 계승 문제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정도로 타타르만큼 몽골부족연합과 철천지 원수로서 몽골에 미친 영향이 크다.
그렇게 20여년간 치열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테무진이 이끄는 몽골부족연합에 패배하고 1206년 테무진이 칭기즈 칸이 되면서 몽골 제국의 일원으로 대부분 흡수된다.
이후 잔당들은 조지아 지역까지 도망갔다가 수부타이의 추격대의 공격을 받아 족장 토크토아가 전사하고 패주하고 1217년에 몰래 세력을 키워 덤비다가 주치에게 패해 전멸하였다.
▣케레이트
케레이트는 몽골 제국 이전 몽골 고원 중북부 한가이 산맥 부근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 부족집단이다.
기원은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킨 키르기스족을 몰아낸 부족 중 가장 큰 집단으로 알려져있으며, 이후 위구르의 일파인 나이만과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였다. 다만 경쟁의 와중에서도 옹구트, 나이만 등 서역의 유목 민족들과 함께 네스토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으며 위구르 문자를 사용하였는데, 여타 몽골 부족에 비해 문화적으로 앞서게 되었다. 요의 복속을 요구 받고 거절해서 침략도 받았으나, 저항 끝에 지역정권으로 인정받았다.
마지막 칸인 토그릴 칸은 초창기 테무진의 힘들었던 시절 든든한 동맹으로 유명하다. 토그릴이 삼촌인 쿠르 칸과 경쟁할 때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에게서 도움을 받고 의형제를 맺었기 때문. 토그릴 칸과 테무진은 동맹을 맺고 금의 타타르 정벌에 참여하여 승리하자 토그릴은 왕의 작위를 받고 테무진은 백호장의 작위를 받는다.
나이만과 메르키트를 함께 상대하면서 동맹이 조금씩 틀어지다가, 자무카가 옹 칸에게 의탁하고 이를 비난하는 테무진이 암살당할뻔 하면서 완전히 갈라선다. 1203년 테무진의 역습으로 옹 칸과 그의 아들 이루카 샌군은 패해 쫓겨난다.[2] 옹 칸은 나이만 땅으로 도망가려 하지만 국경지대에서 살해당한다.
1206년 테무진이 칭기즈 칸으로 등극하고 몽골 제국이 성립되면서 케레이트는 몽골족에 완전히 흡수당한다.
그 후 옹 칸의 동생인 자하감보의 딸 소르칵타니 베키는 툴루이의 아내가 되어 자녀로 훌레구 칸, 몽케 칸, 쿠빌라이 칸, 아리크부카를 낳았다.
몽골 고원에서 케레이트 부족의 이름은 제국의 해체와 함께 이윽고 그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단, 15세기 이후 오이라트 부족 연합에 속하며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토르구트는 케레이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타타르
타타르 부족은 돌궐 제국 시기부터 명칭이 확인되는 실위계 부족으로, 몽골 등과 함께 몽골 고원에서 자리잡고 사는 여러 부족 가운데 하나이다.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실위계 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몽골 초원으로 이주한 세대인 타타르는 점차 성장해 부족 연맹으로 발전했다.
초원으로 이주한 타타르는 돌궐, 위구르 제국과 충돌하거나 이들에게 복속되어 살았으며 5세기에 고비 사막 북동쪽에 살다가 10세기 거란의 요나라의 속부가 됐다.
요가 금에게 멸망당하자, 일부 타타르인들은 야율대석을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긴 여정에 참여했으며 나머지는 그대로 고향에 남았다. 아무래도 영토가 금과 가깝다보니 타타르는 곧바로 금 조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요의 관인을 바쳤다. 그 대가로 금은 타타르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매개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통제하려 했다.
이로 인해 타타르는 키야트 몽골족 최초의 칸이자 칭기즈 칸의 조상인 카불 칸 때부터 카마그 몽골 연맹과 대립했다. 카불 칸의 사촌 동생이자 후계자인 암바가이 칸은 타타르와 화해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타타르에 보내 결혼 동맹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금이 내려주는 은상에 눈이 먼 타타르는 오히려 딸을 직접 데리고 오는 암바가이 칸을 배신하고 금나라에 팔아 넘겼다. 이 때 금의 수도인 중도에 끌려간 암바가이 칸은 사지가 찢겨 문자 그대로 끔살당했다.
이러한 배신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원한, 타타르가 금의 명을 받고 수행해 준 감정(減丁) 정책은 카마그 몽골을 비롯한 몽골 초원의 유목 민족들이 타타르를 증오하게 만들었고 카마그 몽골 연맹은 원한을 갚기 위해 타타르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
여기에 타타르가 부족장인 예수게이를 죽인 것까지 더해져 타타르는 카마그 몽골의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예수게이의 후계자인 테무진은 타타르에 복수하고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천천히 세력을 모았다.
예수게이를 죽여 카마그 몽골 연맹을 약화시킨 타타르는 초원의 패권을 차지하는 듯 했으나, 후원 세력인 금과의 관계가 파탄나는 바람에 금의 지원이 끊기고 생존을 위해 금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크게 패퇴하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아챈 칭기즈 칸은 타타르를 급습해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남자들은 학살하고 여자와 어린이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완전히 흡수해서 자기 세력 안으로 편입시켰다.
몽골 제국이 성립된 뒤 타타르는 몽골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이후 칭기스 칸의 손자 바투 칸은 타타르인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몽골의 침략을 받은 서양,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몽골(이 경우 킵차크 칸국)을 싸잡아 "타타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타타르족"이라 하면 12세기의 타타르 연맹과는 별 관계 없이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정착한 튀르크계 무슬림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현대의 타타르족은 볼가 불가르, 킵차크인, 쿠만인, 튀르크화된 몽골인(노가이인)들의 혈통이 섞여 있다.
▣나이만
나이만은 중세에 존재했던 몽골 서부의 유목 튀르크계 부족이었으나 몽골 제국에 패배 흡수당했다. 일부는 타이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1156년 ~ 1218년)를 따라 서요로 도주했다.
타이양 칸(Таян хан, 太陽汗, 1134년 ~ 1204년)은 나이만족의 마지막 칸인데 12세기 후반에 아버지인 나이만족장 이난차 비르게 칸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4대 칸으로 즉위했다.
형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이에 분노한 이복동생 부이룩이 알타이 산맥 지역을 거점으로 스스로 칸을 칭했으므로 나이만은 동서로 양분되었다.
1203년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과 테무진이 사이가 나빠지면서, 토오릴 칸과 동맹하여 부이룩과 대항하는 계략을 세우지만, 테무진에 의해서 토오릴 칸이 패배하면서 테무진과 맞서게 된다.
1204년 타이양 칸은 메르키트부와 오이라트부 그리고, 망명자 자무카 등과 연합군을 결성해 싸웠으나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테무진에 패배하여 전사하고, 나이만부는 괴멸 당했다. 타이양 칸은 마침 상처가 도져 병사하고 그의 아내는 테무진의 아내가 된다.
아들 쿠츨루크는 도망해 숙부 부이룩에게 의지하나 다시 패배하고 서요에 의지하며 나이만의 잔당을 결집하려 했다. 서요 황제 야율직로고의 부마가 될 정도로 환대받았고 쿠츨루크 본인도 나이만의 종교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버린 뒤 불교에 귀의할 정도로 화답하였으나 곧 배신하고 야율직로고를 폐위한 뒤 스스로 서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218년에 거란족이나, 쿠츨루크의 개종에 불만을 가진 기독교도 나이만인들도 그를 배반하여, 거의 싸우지 않고 쿠츨루크의 세력은 괴멸하였다.
쿠츨룩는 남쪽 파미르 고원으로 향해 도망갔지만, 바다흐샨 주에서 몽골의 원정군에 붙잡혀 참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