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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의 영웅..아흐마드 샤 마수드

frog.ko 2020. 12. 14. 08:01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1953년 9월 2일 ~ 2001년 9월 9일)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주의 운동가, 군인, 군벌, 정치군사 지도자이다.

 

마수드는 소련과의 10년 전쟁(1979-1988)을 승리로 이끈 아프간의 전설적인 야전 사령관이었다. 천부적인 전략가, 탁월한 군사 전문가였다.

 

그를 따르는 수식어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아프간 사람들에게 신앙이자 전설인 마수드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은 <판지셰르의 사자>일 것이다.

 

판지셰르 계곡은 마수드 군대의 본거지였다. 또한 판지셰르 계곡은 러시아 붉은 군대의 무덤이기도 했다. 최신 전투기와 장갑차 그리고 붉은 군대의 막강한 전력으로도 판지셰르 계곡에서 칼리슈니코프 소총 한자루를 들고 싸운 이 초라한 아프간 게릴라들을 이기지 못했다.

 

소련군은 판지셰르 계곡에서 전멸 당했고, 아프간에서 철군했다. 그 후 사람들은 마수드를 판지세르의 사자라고 불렀다.

 

마수드는 10년 동안 소련의 붉은 군대와 싸웠고 다음 10년은 미국과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탈레반과 싸웠다.

 

1998년, 소련과의 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의 삶에 잠시 평화가 깃드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아프간 내부의 또다른 적인 탈레반과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마수드는 테러리즘을 싫어했다. 그는 평생 아프간의 사막과 거친 계곡을 떠돌며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한번도 테러리즘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수드는 소련이나 미국 같은 강대국과 불리한 전쟁을 치루면서도 한번도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다. 자신의 정의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담보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마수드가 탈레반에 맞선 이유다.

 

마수드는 수도 카불에 입성해서 정권을 장악했지만 탈레반이 카불을 폭격한다고 협박하자 탈레반에게 무혈로 카불을 넘겨주고 다시 판지셰르로 돌아간다. 카불의 무고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카불은 결국 탈레반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1993년, 프랑스의 기자 퐁피이는 폐허가 된 카불의 거리에서 울고 있는 마수드를 보았다. 기자는 “그가 우는 것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라고 말했다.

 

1996년 탈레반이 흥기하기 시작하자 탈레반의 원리주의적 이슬람 해석을 거부한 마수드는 재무장하여 북쪽으로 후퇴, 가는 길에 살랑 터널을 파괴하고 타지키스탄의 쿨롭으로 도망하여 탈레반에게 항거하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 속칭 "북부동맹"의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고향인 판지시르를 거점으로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속칭 북부동맹)을 결성하였고 마수드는 다시 국방장관에 취임해 아프간군을 지휘해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아프간 통일을 노리고 진격해온 탈레반과 전투를 벌였다.

 

마수드는 2000년 아프간 여성기본권 선언문에 서명하고 여성의 근로와 교육을 보장하였으며 부르카의 의무적 착용을 폐했다. 이듬해인 2001년 9월 9일 마수드는 탈레반의 사주를 받은 알 카에다 요원들의 자폭 테러로 암살당했다.

 

마수드가 죽고 이틀 뒤 9·11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마수드가 지휘하던 북부동맹 군대와 연합해 탈레반을 쳤다.

 

미국에 맞서기로 결심한 탈레반에게 마수드는 너무 강력하고 불편한 적이었다. 탈레반의 입장에서 마수드는 협상이 불가능한 평화주의자였고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였다.

 

마수드가 죽고 이틀 뒤 9·11 테러가 일어났다.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동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마수드가 지휘하던 북부동맹 군대와 연합해 탈레반을 쳤다.

 

마수드 사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의 명령으로 그에게 "국민영웅"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마수드의 제삿날인 9월 9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수드의 날"이라는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아미르 샤히브에 샤히드라고 높여 불렀다.

 

1996년 말경 아프가니스탄의 상황. 마수드(적색),  도스툼 (녹색),  탈레반 (황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