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인 14세기 등장한 유럽의 한자동맹(영어: Hanseatic League)은 상인들의 거대한 연합 공동체였다. 상인들이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국가나 황제의 통치를 받지 않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이를 중심으로 자유 도시들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Hanse"는 1267년에 등장했으나, 14세기 초 플랑드르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라인강과 발트해의 상업도시들이 주로 해상 교통의 안전을 보장하고 공동 방호와 상권 확장 등을 목적으로길드와 한자를 설치한 것을 시초로 한다.
한자동맹의 기본 골격은 회원 도시들 간에 자유무역, 즉 역내 자유무역이다. 이를 통해서유럽의 회원 도시들은 수공예품 등을 비싼 가격에 동유럽에 수출하고 동유럽의 특산물인 목재, 모피, 역청, 탄산칼륨, 청어 등을 유리한 가격에 들여 왔다.
뤼베크를 맹주로 해 쾰른, 브레멘, 베를린이 뭉쳤고, 함부르크와 뮌스터, 로스토크, 막데부르크, 멀리 단치히(현 폴란드 그단스크), 리가까지 최대 90여 개 도시가 참여했다.
실질적으로 영향력이 미치는 곳을 따지면 오늘날의 영국, 네덜란드에서 러시아까지 광범한 북유럽 무역 네트워크 전역을 지배하던 집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70년에 전성기를 맞았고, 최대 판도는 리가만에서부터 노르웨이의 베르겐, 플랑드르, 런던까지 말 그대로 북해를 안마당처럼 누볐으며, 강을 타고 올라가 독일 내륙의 중계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자동맹이 전성기를 구가한 14세기 후반에는 군대도 확보했다. 상인들은 이 군대를 통해 그들의 무역 독점에 대항하는 왕국을 군사적으로 공격하고 해적들을 소탕했다.
1368년에 한자동맹 소속 도시들은 연합 해군을 조직해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스웨덴의 헬싱보리를 공격해 덴마크와 노르웨이 왕에게서 발트해 무역의 독점적 지위와 무역거래에서 얻은 이익 15%를 세금으로 내는 조건을 얻어냈다.
영국에서 장미전쟁(1455–1487)이 벌어졌을 때 한자동맹은 요크가문에게 자금 지원을 하며 편을 들기도 했다.
15세기 들어 유럽 곳곳에 중앙집권적 국가가 형성되면서 한자동맹은 현지 상권의 도전을 받게 된다 . 16세기엔 한자동맹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스웨덴 왕국이 발트해를 장악한후 신성로마제국 내에 영지를 확보하고 덴마크 상인들도 독자적인 영업망을 구축하면서 한자동맹의 발트해 독점권은 사실상 무너졌다.
결정적으로 두 가지 요인이 한자동맹의 앞길을 막았다. 먼저 종교전쟁. 신교와 구교로 나뉘어 독일 전역을 피로 물들였던 30년 전쟁이 쇠퇴를 앞당겼다. 종교 이데올로기에 경제가 녹아난 셈이다. 풍요의 원천이던 어족 자원도 갑자기 사라졌다.
‘왕 청어’의 산란지가 14세기 말부터 갑작스레 발트해에서 북해로 바뀐 것. 네덜란드가 거대 제국 스페인과 80년 전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원동력도 청어잡이를 비롯한 무역의 힘에서 나왔다. 더욱이 네덜란드에서는 각종 혁신이 잇따랐다. 자금도 어느 곳도 싸게 조달할 수 있었다. 어부 ‘빌렘 벤켈소어’가 개발한 청어 처리법과 통절임법은 청어 보관기간을 크게 늘리며 한자동맹에 대한 우위를 다졌다.
결국 한자동맹은 네덜란드와 영국에 밀리며 17세기 후반 이후 급속하게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