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이 시작될 무렵 세계의 강대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미국 등 7개국이었다.
당시 세계의 패권국이었던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영국의 패권과 세계 방방곡곡에 걸쳐 있는 대영제국을 유지하는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유럽 대륙의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는 ‘영광스러운 고립정책’ 혹은 ‘유연한 균형자 정책’을 대외 정책의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이 무렵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나라들은 러시아, 미국, 일본 등이었다. 미국은 1889년 스페인을 격파한 후 태평양 지역으로 뻗어나가는 세력이 됐고 러시아 역시 동아시아로 그 세력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세력은 반드시 막아야 할 힘이라고 생각했던 영국은 극동을 향한 러시아 팽창을 일본을 통해 막으려고 1902년 일본과 동맹을 체결했다.
영·일동맹을 통해 세계 외교무대에서 발언권을 가지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의 여세를 몰아 1904년 러시아마저 격파, 1905년부터는 자타가 공인해 주는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의 길을 추구했지만 일본의 팽창 야욕은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일본은 능수능란한 외교정책을 제국주의 팽창정책과 병행해서 추구했다. 현재 일본 대외정책의 핵심축이 미일동맹에 있는 것처럼 1902년 이후 수십 년간 일본 외교정책의 기본 축은 영일동맹이었다.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은 영일동맹의 의무를 들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그러나 애당초 영일동맹은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저 핑계에 불과했고, 일본은 독일 본토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고립된 독일의 아시아-태평양 식민지을 노리고 참전한 것이다.
참전 이후 일본은 독일령 칭다오와 남양군도를 장악한 이후에는 영-프의 병력지원 요청을 무시하고 지중해에 소규모 함대 파견만 한 뒤 강 건너 불구경만 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아무도 관심없는 사이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중국 대륙에서 독일의 조차지였던 산둥성의 청도를 점령하고, 세계대전으로 유럽열강이 아시아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음을 확인한 일본은 1915년 중국 원세개 정부에 21개조 요구를 강요하였다. 21개조는 단지 경제적 요구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주권을 현저하게 침해하는 내용이었다. 21개조 교섭은 중국 측의 맹렬한 반대와 미국의 견제에 의하여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일본은 일부를 삭제한 후 최후통첩의 방식으로 중국을 협박하여 강제로 승인토록 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경제 불황과 재정위기를 한 번에 떨쳐내었다. 유럽 상품에 대신해서 면직물 등의 일본상품이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여 무역은 압도적인 수출초과가 되었다.
세계적으로는 선박의 부족사태가 일어나면서 일본의 해운업 · 조선업은 공전의 호황을 누리게 되고 일본은 세계 제3위의 해운국이 되었다. 철강업, 화학공업, 전력사업 등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면서 1차대전 이후 비로소 처음으로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을 앞지르게 되었다.
일본은 1차대전이 일의킨 특수경기의 최대 수혜자로 1914년 러·일 전쟁등으로 11억 엔의 대외 부채를 지니고 있었던 일본은 2020년 27억 7천만 엔의 채권국이 되었고 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13년 1%에서 1918년 5%로 성장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1차세계대전 직후 승전국 지위로 독일이 가지고 있던 영토를 할양받아 오세아니아 제도를 독차지하였고 미국과 함께 태평양 반을 관리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얌체같은 짓 때문에 일본은 종전 이후 구미 열강의 미움을 샀고 이는 곧 영일동맹 파기와 전쟁 도중 중국에게서 얻은 대부분의 이권을 포기하라는 열강의 압력, 그리고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고 러일전쟁 이후 20여 년간 일본이 세계 5대 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