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1526년 ~ 1857년)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오늘날의 인도 중남부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이슬람 국가이다. 무굴 제국은 몽골의 후손들이 세운 우즈베크 공화국에서 태어난 바부르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부르는 원래 인도보다 사마르칸트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티무르의 옛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두 번에 걸친 시도에서 오히려 고향까지 잃어버린 그는 차선책으로 파니파트 전쟁을 통해 당시 쇠락한 델리의 로디 왕조를 물리치고 무굴 제국을 세웠다.
바부르는 몽골족에서 유래한 바를라스족 출신이었다. 바를라스족은 투르크 지역에서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았기 때문에 언어나 습관에서 투르크인화되었다. 따라서 바부르는 무굴인이라 불리면서도 자신의 지지세력은 대부분 투르크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세운 제국도 투르크적 성격을 띠었다.
그의 부계는 티무르의 제5대 직계 후손이고 모계는 최초의 몽골 대정복자 칭키스 칸의 13대손이다. 티무르의 자손이자 모계로 칭기즈 칸의 황금씨족 혈통을 잇는 인물로 본래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던 군주였는데, 티무르 왕조의 내전과 우즈베크족의 침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다가 1504년, 카불을 점령했다.
바부르는 이후에도 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트에 대한 재진출을 시도했으나, 우즈베크인들에게 패배해 번번히 실패했다. 이후 바부르는 인도로 시선을 돌렸는데, 바부르는 과거 티무르가 인도 델리 근처까지 점령했었고 자신은 티무르의 후손이므로 자신이 인도를 지배해야 할 정당한 군주라고 주장하며 인도를 침공했다.
결국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로디 왕조에 맞서 대승을 거두고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강력한 저항 세력인 아프가니스탄계를 물리치고 영토 확장을 꾀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쫓겨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도망갔다. 그 사이 델리에는 후마윤을 물리친 쉐르 샤가 수르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수르 왕조는 겨우 15년 만을 유지한 뒤 이란의 도움을 받은 후마윤에 의해 멸망당했다.
후마윤의 뒤를 이은 악바르는 북인도 전역을 차지한 뒤 남부의 데칸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마우리아 왕조 이후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를 이루었다. 그는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전 분야에서도 무굴 제국의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고 종교적으로도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포용하는 융화책을 취했다. 종교적 융화책은 자항기르와 타지마할로 유명한 샤 자한으로 이어지지만 아우랑제브가 다시 종교적 억압책을 실시하면서 제국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아우랑제브가 사후 그의 세 명의 아들들이 서로 황위를 차지하려 다투다가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인 무아잠이 형제들을 몰아내고 바하두르 샤 1세로 즉위한다.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가 만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는 마라타 동맹과 라지푸트의 저항을 잠시 잠재우고시크교도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무굴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아우랑제브와 달리 힌두 귀족들과 라자들에게 친화적인 정책을 취하여 이교도들의 무굴 제국 교화에 많은 신경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바하두르 샤 1세는 즉위할 때부터 이미 나이가 63세의 고령이었기에 제국을 오랫동안 통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재위 5년 만에 사망한다.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한 뒤 황위를 둘러싼 암투는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제국의 쇠락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끝없는 분쟁 속에서 황제들이 잇따라 교체되면서 제국은 황제권이 약화되고 궁정 귀족들의 세력이 날로 커져만 간다. 이러한 황위 분쟁은 1719년 13대 황제 무함마드 샤가 즉위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된다. 하지만 이미 무굴 제국이 쇠퇴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제국의 개혁파 재상(니잠 울물크)이었던 튀르크계 데칸 총독 카마루딘 칸이 무굴 궁정의 타락상에 실망하고, 개혁을 포기한 채로 영지 하이데라바드로 내려가 아사프 자흐 1세로 독립한 것(1724)을 시작으로, 아와드 나와브 사아다트 알리 칸(1724), 벵골 나와브 슈자웃딘 무함마드 칸(1727) 등 독자 세력을 갖춘 지방 총독들에 의해 제국의 주요 지역이 사실상 독립국으로 변한 것이다. 특히 제국 재정의 절반을 담당하던 벵골, 군사적으로 강성한 하이데라바드 등이 독립함으로써 무굴 제국은 급격히 약화되어 갔다.
마라타 동맹(1674년 ~ 1818년)과의 오랜 대립에서는 차츰 수세에 몰려, 1737년에는 마라타에 델리를 공격받고 말와 지역을 뺏기게 된다. 거기다 1739년에는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의 전투 기계 나디르 샤가 델리 근처에서 무함마드 샤의 무굴 제국군을 대파하고, 델리로 입성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여, 무굴 제국은 실질적으로는 한 번 망했다. 실질적인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이 수도인 델리밖에 없없다.
과거 무굴 산하의 일개 지역이었던 아와드 세력이나 심지어 과거의 적이었던 마라타 동맹에 빌붙어 작위와 징세권을 바치고 보호받는 신세로 전락한다. 인도 각지는 마라타 동맹 등 힌두계 왕국들과 이슬람계 술탄국인 마이소르 왕국,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이 나누어 접수한다.
그러자 이 틈을 노린 영국은 1757년의 플라시 전투(7년 전쟁의 인도 전역)에서 벵골-프랑스 연합군에 승리한 이래 동인도 회사를 내세워 소왕국들을 회유·정복했다. 마라타 동맹과 마이소르 왕국은 둘 다 영국에게 대항하였으나 실패하고 18세기 말(마이소르) 내지 19세기 초(마라타)까지는 투항하고 만다.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의 와중에 수도 델리가 영국에 점령되어(1803) 완벽하게 영국의 꼭두각시가 된 19세기에도 무굴 제국은 명목상으로나마 50여 년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지만(영국의 보호국 처지이기는 하나 번왕국으로 취급되지 않았으며, 명목상 다른 번왕국 위에 있는 위치로서 황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가 세포이 항쟁을 뒤에서 지원하자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고 포로가 된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하여 추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무굴 제국은 멸망한다(1857년). 그렇게 인도 최후의 왕조인 무굴 제국은 33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무굴 제국을 없애고 나머지 남인도 및 스리랑카, 심지어 버마까지 병합한 영국은 전 인도를 아우르는 단일 거대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1877년 수립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