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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몽골 왕조.. 우즈베키스탄의 3대 칸국, 1924년에 망했다.

frog.ko 2020. 12. 17. 13:47

샤이바니 칸(=아불 파스 무함마드:1451년대 - 1510년 12월 2일)은 1500년부터 우즈베크족의 칸이었다. 그는 전임자들이 추구한 우즈벡 부족들의 통합을 위한 노력을 계승하였으며,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트란스옥시아나에 나라를 건국했다.

 

샤이바니는 조부 아불 하이르 칸이 죽은 이후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다 티무르조에서의 망명 생활을 거쳐 1487년 모굴 칸국의 마흐무드 칸의 신하가 되었다. 마흐무드 칸으로부터 야씨시의 통치를 위임 받은 후 샤이바니는 흩어져 있언 우즈벡 유목민들을 재규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1500년 카자흐 세력과 휴전하고 트란스옥시아나 정복에 나섰다.

 

1500년, 샤이바니는 할아버지인 아불 하이르 칸이 그랬듯 티무르 왕조를 사마르칸드에서 쫓아냈다. 이후 그는 티무르 왕조의 지도자 바부르(무굴 제국의 창시자)에 대한 여러 번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505년 그는 사마르칸드를 재점령하고, 1506년에는 부하라를 점령했으며, 1507년에는 헤라트마저 점령하여 샤이바니 제국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샤이바니 칸은 1508 - 1509년에 걸쳐 카자흐 칸국을 공격하여 북방을 안정시킨다. 하지만 1510년 초, 카심 칸의 지휘 하에 단결한 카자흐 군대에 패배하고 마침 이란을 접수해 가던 사파비 왕조의 창건자 이스마일 1세에게도 대패한 후 그 자신도 전사한다.(1510.12.2, 메르브 전투)

 

메르브 전투 이후 1511년까지 이란 사파비 왕조의 트란스옥시아나 지배했으나 1511년, 트란스옥시아나는 서부와 호라즘 지역의 아랍샤 왕조의 히바 칸국,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의 샤이바니 왕조의 부하라 칸국으로 나뉘어 진다.

 

하지만 모든 우즈베크 족이 샤이바니 칸을 따라 부하라 칸국에 합류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세력은 현재는 카자흐스탄 서부인 아랄 해 북부 연안에 남아 있었고, 그들은 동포들이 애써 정복해 놓은 땅을 수복하기 위해 1511년, 일바르스 1세(샤이바니 칸의 조부인 아불 하이르의 조부인 아랍 샤 이븐 풀라드의 또다른 후손)의 지휘 하에 남하했다.

 

시아파를 혐오한 히바와 우르겐치 주민들의 봉기에 힘입어 1512년에는 페르시아 군대를 완전히 몰아내었고, 1515년에 완전 독립한다.

 

16세기 말 이후로 시베리아 및 현 카자흐스탄 북부 초원지대를 통해 중앙아시아로 차차 침투해 온 러시아는 1717년, 표트르 대제의 분견대를 히바에 파견한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사이에 기술력 차이도 크지 않았고 초원-사막지대라는 험지를 극복할만큼 교통이 발전되지 않아 파견대는 패배한 후 실종되었고 그 후 한세기 반, 150여년 이상의 세원 동안 러시아 조정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1740년, 이란의 튀르크 계 전투기계인 나디르 샤에 의해 부하라 칸국과 함께 정복되며 1747년까지 아프샤르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나디르 샤 사후 그의 제국은 공중분해 되었고 트란스옥시아나 지방도 전처럼 독립을 찾았다.

 

러시아 제국은 1868년 부하라 칸국, 1873년에는 히바 칸국을 점령했다. 1886년에는 페르가나 분지의 코칸트 칸국까지 점령하게 된다. 코칸드 칸국은 합병해 한 주로 만들었지만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은 조약을 맺어 보호국으로 만들어 나라는 괴뢰국으로 유지시켰다.

 

187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보호국 신세였던 히바 칸국은 1917년의 러시아 11월 혁명과 뒤이은 적백내전에 휘말렸다. 공산주의자들은 전근대적 칸국인 히바 칸국을 봉건적 잔재로 간주하여 적폐청산 대상으로 보았다.

 

히바 칸국은 어쩔 수 없이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백군에 힘을 보태 러시아 내전에 참가했으나 패배하고 히바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1920년, 화레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개편되며 멸망한다. 화레즘 소비에트 공화국은 1924년에 공식적으로 소련에게 병합되었다. 이로써 보르지긴 혈통의 지도자 계보는 단절되고 만다.

 

▣아불 하이르

아불 하이르는 1412년에 태어났다. 그는 칭기즈 칸의 손자, 주치의 5남 샤이반의 후손으로, 백장 한국의 벡였다. 당시 샤이반의 울루스는 여러 유목 집단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주마두크 칸이 이끄는 집단이었다. 아불 하이르는 주마두크에 충성을 받쳤으나, 1427년 주마두크는 전투의 와중에 전사하고 아불 하이르는 포로가 되었다.

 

1428년에 석방된 아불 하이르는 투라 강가의 튜멘을 중심으로 샤이반 울루스의 유목 집단들을 연합시키기 시작했다.[1] 그는 토볼 강 전투에서 시비르 한국의 칸에게 승리하고 그를 폐위한뒤 서부 시베리아의 칸을 자칭했다. 이후 4년간 그는 자신의 지배권을 강화해나갔다.

 

아불 하이르 칸은 백장 한국의 에디구의 손자, 바카스 베그 망기트족의 지원을 받아[5] 우즈베크족을 조직했다.

 

1430 - 31년, 아불 하이르는 바카스와 함께 화레즘을 공격해 우르간즈를 점령했다. 그러나 1431년, 우즈베크인들은 도시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아불 하이르의 군대는 아스트라한 부근에서 자신에게 대항하는 두명의 칸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1435 - 36년 우즈베크 군대는 화레즘을 다시금 공격하고 몇 년 뒤에는 아스트라한을 공격했다. 1446년 초반에 아불 하이르와 그의 군대는 시르다리야 강 유역을 공격해 결국 티무르 왕조의 땅 일부를 빼앗았다. 시그나크는 아불 하이르의 새 수도가 되었고, 트란스옥시아나에 대한 그의 공격은 그 곳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1451년 아부 사이드는 아불 하이르 칸에게 압둘라를 격파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불 하이르는 아부 사이드를 도와주기로 하고, 두 군대는 사마르칸드로 진군했다. 압둘라는 전사하고 그의 군대는 격파 당했다. 하지만 아부 사이드는 즉각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도시로 들어가 성문을 닫고 아불 하이르와 우즈베크인들을 쫓아냈다. 아부 사이드는 뒤따른 분란을 피하기 위해 우즈베크인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줬다.

 

1468년 아불 하이르는 죽었다. 그의 사후 우즈베크인들의 국가는 화레즘과 트란스옥시아나에 각각 성립되었다. 16세기의 첫 10년에 아불 하이르의 손자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두 우즈베크인들을 연합해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한 샤이바니 제국을 세웠으나, 오래가지 못 했다.

 

계 국

몽골계 국가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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