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이 중국 역사에 편입된 것은 그리 길지 않다. 1500년대 배를 타고 대만을 지나가던 포르투갈인들이 대만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일하 포모사(Ilha Formosa)’라고 명명했다.
이 말은 포르투갈 말로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이다.
이후 대만이 17세기 초 네덜란드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7세기 중반 반청운동을 벌이던 정성공(鄭成功)의 지배를 거쳐 1683년 청나라의 영토가 됐지만 포르투갈인들이 붙인 ‘포모사’라는 명칭은 서양사회에서 널리 쓰였다
그 이전 시기에도 타이완 원주민들이 정주, 생활하여 왔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타이완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들의 섬이었다. 명·청대 들어 점차 한족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타이완의 역사는 크게 16세기 이전 시기(선사 시대 포함), 네덜란드 점령 시기, 정씨왕국 시기, 청나라 시기,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 시기, 중화민국 시기(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타이완)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타이완 섬에 맨 처음 도달한 민족 집단은 말레이 폴리네시아계의 민족(지금의 고산족)이다. 이들은 부족마다 따로 떨어져 생활했기 때문에 국가를 형성하지 않았고, 문자도 없었기 때문에 역사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중국대륙의 삼국시대에는 타이완을 이주(夷州)라 불렀는데 이릉 대전 이후 오나라는 주민부족에 시달렸다. 이에 손권은 230년 봄에 위온과 제갈직에게 정병 1만명을 준 뒤 이주와 단주 등을 샅샅이 뒤져서 주민들을 징발해오도록 명령했으나 위온과 제갈직은 가는 동안 풍랑을 만나 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잃고 그렇게 징발해온 말레이 폴리네시아계 원주민은 고작 1천명에 불과했다. 이에 손권은 대노하여 위온과 제갈직을 주살했다.
13세기 후반 원나라가 펑후 제도에 행정 기관을 설치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타이완섬을 통치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한족 등이 세운 명나라가 펑후 제도를 차지 했지만, 역시 타이완섬은 별도로 다스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타이완에 관련된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는 때는 유럽인의 상륙 이후이다. 17세기가 되면서 스페인인이 타이완의 북부지역 (타이베이 시, 지룽 시, 신베이 시 일원)을 차지하고,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타이완의 남부지역 (타이난 시 일원)을 차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농사를 짓기 위해 푸젠성, 광둥성에서 사는 한족들을 모집해 타이완으로 이주시켜 농업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이들이 타이완에 정착하면서 현대정치에서 본성인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서 한족 남성이 유입되면서 원주민 여성과의 결혼 빈도가 늘어나 자연스럽게 타이완만의 독특한 혈통이 형성되었다.
1368∼1644년경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건국하면서 청나라를 반대하는 중국인들이 대규모로 대만으로 이주하는데 이들을 본성인(내성인)이라고 한다.
본성인들의 우두머리는 정성공인데 아버지인 정지룡(鄭芝龍)은 1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의 상선을 타고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당시 타이완 섬을 비롯한 5도 열도 지역은 왜구의 소굴이었다. 정지룡이 일본에 체류할 때 히라도(平戸)에서 마쓰라 씨의 하급 가신인 다가와 시치자에몬 (田川七左衛門)의 딸 타가와 마츠(田川 松)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정성공이며 어릴 적 이름은 후쿠마쓰(福松), 중국식 이름은 삼(森)이었다.
정지룡은 곧 이단(李旦)이라는 무역상과 교역을 했는데 이단이 죽은 후 경쟁하던 해적과 다른 상단을 몰아내고 최강의 군벌로 성장하였고, 명나라로부터 복건성(福建省, 지금의 푸젠성) 일대에서 지방 장관급인 도독직에 제수되었다. 정지룡은 도독이 된 후 복건으로 아내와 아들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히라도 관리의 불허로 결국 후쿠마쓰만 복건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1644년 청나라의 공격으로 명이 몰락하자 아버지와 반청복명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청군에 패하게 된다. 이후 군사를 추스려서 1661년에 대만을 공격해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푸젠성의 중국인(Hoklos)들을 대만에 이주시킨다. 또한 삼합회라는 유명한 단체도 이때 결성됐다. (푸젠성출신의 중국인: 복건인(Hoklos), 민남어, 현 대만인구의 70%)
정성공이 대만을 정복하면서 명나라유민세력의 중국인과 토착원주민들인 적당한 주변관계를 맺고 이들의 협조를 통해 청나라와 항쟁체제를 꾸렸다. 그러나 정성공이 죽으면서 원주민의 거주지역을 잠식해들어가면서 점점 원주민들과 갈등이 벌어진다. 그 후 청나라에게 정씨일가가 멸망당하면서 청나라가 대만을 다스리게 되자 본성인들은 본격적으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 원주민을 극심한 탄압과 학살로 죽이고 몰아내면서 산골짜기까지 추방시켰다. 참고로 청나라가 대만을 지배하면서 광저우성의 중국인(Hakkas)이 건너왔다.(광저우성출신의 중국인:객가인(Hakkas), 객가어, 현 대만인구의 14%)
1662년 정성공이 죽은 이후에도 아들 정경이 타이완을 통치하였다. 정경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 처음으로 타이완에 사실상의 중국계 국가가 건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씨 일가의 타이완 지배는 만주족의 타이완 정벌에 의해 끝나버렸다. 이로써 타이완은 청나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당초 청나라는 정씨 일가를 응징할 목적으로 타이완을 공격했으므로 타이완을 직접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왜적의 침입을 막아야 되는 등의 군사적인 이유로 타이완을 활용하였다. 청나라는 타이완 섬에 1부(府), 3현(縣)을 설치하고, 푸젠성의 관할하에 두었다. 하지만 청나라의 통치력은 타이완 전역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로 현재 타이완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유권 주장이나 1945년 중화민국 귀속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타이완 섬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했던 원주민은 푸젠성, 광둥성으로부터 생활이 어려운 한족들이 대거 타이완으로 이주 및 정착하였고, 당시에 스스로 한족과 동화되어 가던 청나라는, 관청에서 조직적으로 타이완 원주민에게 성씨나 가계도, 족보 등을 부여하여 한족화를 추진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청나라 조정과 원주민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에 동화되어 갔다.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청나라는 일본 제국이나 구미 열강의 대외 진출에 대한 방어 거점으로 타이완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어, 1885년에 타이완을 푸젠성에서 분리해 타이완 성으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1894년 일어난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여 일본의 주도하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만주와 펑후 제도를 비롯해 타이완 섬을 일본에게 할양했다.
1895년 일본이 대만을 지배하게되었는데 청나라보다 휠씬 좋은 통치로 주민들의 호감을 샀다. 이때 일본은 자신들도 식민지 경영을 할 수 있는 일등국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대만 통치에 많은 노력과 투자를 했지만 그에 비해 조선은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여겼다.
식민지 시절 일본의 유화정책도 한몫을 했다. 일본에 한반도는 식량 및 지하자원 수탈의 대상이자 대륙 침략의 발판이었다. 그러나 대만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열도의 연장선 또는 홋카이도처럼 확장한 영토로 여겼다. 한반도처럼 강압통치를 할 필요가 적었다.
어차피 본성인입장에서 청나라나 일본이나 둘다 이민족이나 다름이 없는데 청나라보다 휠씬 살기가 좋았으므로 일본에 크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또한 대만건국의 아버지라고 할수 있는 정성공의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점도 대만인에게 일본은 큰 호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