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데이비슨 록펠러(영어: John Davison Rockefeller, Sr., 1839년 7월 8일 ~ 1937년 5월 23일)는 미국의 사업가·대부호이다.
록펠러는 1839년 뉴욕 주 리치포드에서 태어났다. 16살이 되던 해 그는 휴이트 앤 터틀이라는 곡물 도매회사의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1859년 동료인 모리스 클라크와 함께 ‘클라크 앤 록펠러’라는 회사를 설립해 생필품과 음식을 팔아 엄청난 돈을 벌어 들였다.
뒤이어 약사인 사무엘 앤드루스까지 끌어들여 ‘록펠러 앤 앤드루스’라는 회사를 창업해 1862년 당시 벤처와도 같았던 석유 산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미국에선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전국적으로 석유 붐이 일고 있었다. 록펠러는 남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유전 탐사와 채굴에 열중할 때 부가가치가 더 큰 정제산업에 주목했다.
1867년 헨리 플래글러를 끌어들여 ‘록펠러, 앤드루스 앤 플래글러’라는 회사를 창립해 지역 정유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는 록펠러의 인생을 온전히 바꿔놓았다.
남북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수물자의 운송이 필요했고 클리블랜드 인근 타이터스빌에서 유전이 발견되자 석유산업이 급성장하게 되었다. 록펠러는 석유운송과 정유사업의 전망을 예측해 사업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압도적인 생산량에서 나오는 단가 절감 뿐만 아니라, 리베이트 시스템으로 인한 운송비 절감에 힘입어 스탠다드 오일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
그의 회사의 거대함으로 인해, 록펠러는 철도업계에 일정하고 높은 수준의 수송량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록펠러는 리베이트 계약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얻기 시작한다. 이를 바탕으로 1870년, 록펠러는 100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진 스탠더드 오일을 창설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관련 기업의 수직, 수평적 결합을 통해 실질적인 시장독점을 이뤘다. 이를 경제사에서는 ‘트러스트’라고 부른다. 미국 석유 시장의 90%를 통제했다. 법률적·경제적으로 독립한 동종사업자들이 상호경쟁의 제한이나 시장통제를 위해 수평적으로결합해 상거래 조건 등에 대해 공동행위를 하는 ‘카르텔’보다 더욱 강력한 형태다. 트러스트는 독점의 가장 강력한 형태로 경제적인 위력도 가장 강하다. 강력한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오일은 록펠러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줬다.
록펠러는 미국의 철도 산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스탠더드 오일의 석유를 미국 전역에 운반하기 위해서는 거미줄 같은 철도망과 원활한 철도 운용 시스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유 산업은 철도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으며 잘 연결된 철도망은 석유 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다.
하지만 석유산업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스탠더드 오일은 1899년 연방 반(反) 트러스트법 위반 혐의를 인정받아 트러스트를 해체했다. 이어 1911년 같은 이유로 미국 대법원에 의해 아예 기업을 해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스탠더드 오일은 34개의 서로 다른 기업으로 분리됐다. 이렇게 분리된 기업 중 일부는 발전을 거듭해 현재 세계 최대 수준의 석유기업인 엑손모빌(ExxonMobil)과 세브론(Chevron) 등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분리된 스탠더드 오일 계열사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자마자 주식 가격이 최소 2배 이상 뛰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원래 스탠더드 오일 전체 지분의 25%를 소유하고 있었던 록펠러는 새로 탄생한 34개 사의 지분을 골고루 소유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스탠더드 오일이 존속했을 경우보다 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쪼개버린 덕에 유럽계 석유회사들은 쾌재를 부르게 되었고, 쪼개진 스탠더드 오일사의 일부를 인수하기도 했다.
실제 해산되기 전 스탠더드 오일은 거의 전 세계 석유시장을 독점한 상태였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을 장악한 이후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최대주주인 로열 더치 쉘, 알프레드 노벨 일가가 운영하는 러시아의 노벨브라더스와 경쟁했고, 결국 승리했는데 이후 세계 석유시장은 스탠더드 오일이 해체되기 전까지 그야말로 한 기업이 독점했던 셈. 이런 록펠러 시대의 스탠더드 오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사례였다.
석유가 없으면 살아가기가 어려울 만큼 세계는 석유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록펠러는53세 때 세계 최고 부자 순위 1위에 올랐다. 33세에 백만장자, 43세에 미국 최고의 부자,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것다. 한때 록펠러 재산은 14억 달러[현재가치 환산:3천310억 달러395조 원)]로 미국 GDP의 1.5% 이상을 차지했다.
록펠러 1세가 쌓은 많은 부는 자연스럽게 록펠러 2세에게 상속되었다. 록펠러 2세 역시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했던 미국 경제의 흐름에 편승해 막대한 부를 쌓아가는 한편, 가문의 오명을 씻기 위해 록펠러 재단과 대학 등을 통해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록펠러 3세에 이르면서 굳건하던 장벽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록펠러 3대 형제들 중 차남이었던 넬슨이 정계로 뛰어들며 청문회에서 가문의 재정관계와 비리를 낱낱이 공개하며 1세와 2세가 평생을 바쳐 쌓아왔던 영광의 빛을 자신의 야망을 위해 깨뜨렸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한 장벽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가문의 그늘을 벗어나고자했던 록펠러 4세에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록펠러 7세이 이르러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록펠러센터까지 이전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1933년 대공황 당시 록펠러 1세가 맨해튼 한복판에 70층 높이로 세운 록펠러센터는 20세기 미국의 번영과 자본주의를 상징할 뿐 아니라 록펠러 가문의 성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57층을 사용해오던 록펠러재단이 이 곳을 떠났다.
록펠러재단은 그동안 각종 자선사업과 기부 등으로 재산을 탕진해왔다. 물론, 선대의 영광을 이어가지 못한 후대의 무능함과 7대를 이어오며 가문의 인원만 300여 명이 된 것도 영향을 주었다. 현재 록펠러가문의 전체 재산은 100억 달러로, 미국 내 부호 가문 중 24위를 유지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부자 순위 1위가 록펠러, 만사 무사가 2위, 앤드루 카네기 회장이 3위이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자산은 1429억 달러로 전체 15위이며 빌 게이츠가 역대 37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