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이 종언을 고하며 중국대륙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내전 초기 국민당 군대는 미군이 물려준 무기에 힘입어 각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국민당 정부를 타도하려면 대략 5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장기간에 걸친 고난의 투쟁을 할 준비를 했다.
전세의 역전은 만주에서 발생했다. 2차 대전 마지막 장에 소련군이 만주로 밀려 들었다. 소련군은 일본의 위성국인 만주국을 해체한 후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을 점거하고 장춘(長春)철도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청나라 말기 옛러시아의 권리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만주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보였다.
소련군은 만주에 활약하던 공산군을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당시엔 국민당군과 그 배후에 있는 미군과 싸워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중공의 입장에선 소련군의 지원이 수세에서 벗어나는 좋은 기회였다. 화북지역에서 활약하던 공산당 세력은 동북3성에 무장세력들을 대거 파견했다.
소련군의 묵인 아래 동북으로 진입한 공산군은 현지의 무장세력들을 흡수하면서 빠르게 세력을 확대해 1945년 12월에는 10개 군구 약 27만여명에 달했다. 또 소련군은 투항한 관동군으로부터 접수한 무기의 태반을 공산군에게 넘겼다. 동북 지역에서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균형을 이루는 듯 보였지만, 국민당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1948년 가을이 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공산군은 요동지역의 국민당군을 포위했고, 장제스가 네 번이나 선양(瀋陽)에 날아와 반격을 지휘했지만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10월 17일에는 창춘이, 11월 6일에는 선양이 함락되면서 국민정부군은 전멸했다.
동북3성을 공산군에게 넘겨주면서 두 세력의 균형이 무너졌다. 만주에서 승기를 잡은 중국 공산당은 순식간에 대륙을 집어 삼켰다. 1949년 1월 21일 장제스는 총통 자리에서 하야를 선언했고, 11개월 뒤 대륙의 마지막 거점인 청두를 버리고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중국 대륙이 공산세력에게 무너진 것은 만주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 배후엔 소련군의 지원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1945년 만주에 당의 핵심간부 가오강(高崗)을 동북3성의 군사령관으로 파견했다.
그러면 가오강은 어떤 인물인가. 산시(陝西)성 출신인 그는 1927년 산시성 북부에서 혁명운동에 참여하며 공산당 서북 근거지를 창시했다. 그러다 국민당에 쫓긴 마오쩌둥 군대가 도착하자(長征), 마오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당시 마오 군은 1만명 정도로 축소되었을 때였으니, 마오의 입장에선 가오강이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가오강은 친소파였다. 공산종주국인 소련의 도움을 받고 소련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주장했다. 국민당과의 내전시기에 마오는 그를 필요로 했다. 소련이 점령한 만주지역에 가오강을 보낸 것도 소련과 좋은 관계를 맺어 만주를 국민당 손에서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한족이 만주를 완전히 내지화한 적은 없었다. 몽골(元)과 여진(金, 淸)이 중국을 지배할 때 만주가 중국 영토였지만, 한(漢) 당(唐), 송(宋), 명(明)나라의 한족 정권 때에는 만주가 이민족의 땅이었다. 2차 대전 말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150만명의 병력을 만주에 투입해 점령했다.
소련군은 장제스가 외몽골을 승인하는 조건하에 1946년 3월 만주에서 철군했다. 하지만 소련은 철군후에도 만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뤼순과 다롄에 일부 군대를 남겨 놓았고, 만주 철도를 운영했다.
가오강은 소련을 뒷배경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2차 대전 종전후 만주는 일본이 대륙침략기지로 산업화시킨 덕분에 중국내에서 산업시설이 발달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소련군이 관동군에 빼앗은 무기도 가오강 휘하 군대가 물려받았다. 국공내전에서 가오강의 군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동북3성의 제4야전군은 중국 전역의 6개 군관할지에서 최대, 최고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가오강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오의 입장에선 어제의 동지가 견제세력이 된 것이다.
1949년 8월 베이징의 중앙 정부는 만주 행정기구를 동북 인민정부로 개편하고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부주석으로 승진한 가오강은 지역군벌이나 다름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타이완과 한국 방위에 개입했다. 전세가 바뀌어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해 만주가 위협을 당하자 1950년 10월초 베이징에선 중공 지도부들 사이에 한국전 참전 여부에 대한 팽팽한 논쟁이 벌어졌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중공 권력 장악의 기회로 삼았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분권적인 구조를 집중화하고 사회주의 발전 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2인자 류샤오치의 지위 변동을 목적으로 하는 옌안체제 재편을 시도하였다. 그것을 통하여 분권적 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과도시기총로선으로의 사회주의 발전 노선의 전환을 이루었지만, 파벌연합체제의 구조로 인하여 류샤오치의 지위 변동을 이룰 수 없었다.
반면 마오쩌둥의 의사에 따라 류샤오치를 타도하려고 했던 가오강이 당의 조직 규율에서 어긋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가오강이 숙청된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 결과 류샤오치의 지위가 안정화되고 옌안체제의 재공고화와 부분적인 권력재편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