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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전쟁 '보스니아 전쟁'

frog.ko 2020. 12. 23. 22:20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분열 과정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이 벌어진 곳은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도 크로아티아도 아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였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보스니아가 최약체였기 때문이다. 보스니아가 약체인 데다 결정적으로 어느정도 국내 민족 구성이 지역을 단위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와 달리 보스니아는 이슬람교(보슈냐크계) - 가톨릭(크로아티아계) - 정교회(세르비아계) 사람들이 한 지역 내에서도 뒤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슬람 공화국으로 독립을 원하는 보슈냐크계 무슬림들과, 영토를 유지하려는 세르비아계 정교회, 독립한 김에 영토 확장을 노리던 가톨릭 크로아티아계가 뒤엉켜서 총부리를 서로 들이댔다.

 

그래서 보스니아 전쟁은 초기부터 종교 전쟁으로 흘러가, 자기 종교가 아닌 타 종교 인원들에 대한 대량 학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인은 통틀어서 남슬라브 민족으로 사실 슬로베니아부터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에 이르기까지 언어는 표기 문자만 다르지 똑같았고, 이들을 구분하는 단위가 바로 종교였다. , 종교를 배경으로 민족이 쪼개져 버린 것.

 

1991년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방 탈퇴로 시작된 연방 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연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전쟁 중기인 1994년의 인구 구성

보스니아 분쟁은 초기에 보스니아 내의 유고슬라비아 육군 세력이 한 편으로 나중에 스릅스카 공화국군(VRS)로 재편되었으며, 이에 맞써 보스니아인으로 구성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ARBiH) 및 크로아티아계로 구성된 크로아티아 국방위원회(HVO)가 같은 편으로 싸웠다. 

스릅스카 공화국:SAO 보산스카 크라이나, SAO 헤르체고비나, SAO 로마니아 등 SAO(사라예보 자치주)로 독립했으나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통합

하지만 1992년 말부터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트인 사이 민족 긴장이 높아지면서 결국 1993년 초에는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은 격렬한 전투, 도시와 마을에 대한 무차별 포격, 인종 청소 및 체계적 집단강간 등의 행위가 일어난 것이 특징으로 이런 일은 거의 대부분 세르비아계가 저질렀으며 그 외에도 세르브계보다는 적지만 크로아트계[ 및 보느시아계 군사들도 이런 행위를 자행했다. 전후 분쟁의 상징으로는 사라예보 포위전과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의 사건이 알려져 있다.

 

세르브계는 처음에 유고 인민군이 제공한 무기와 지원으로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1994년 워싱턴 협정에 따라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트계가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항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으로 합치면서 구심점을 잃었다.

 

1994년 스레브레니차와 마르칼레 학살 이후 파키스탄이 유엔의 보스니아계 무슬림에 대한 소화기 및 미사일 무기 금수조치를 어기고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1995년에는 NATO가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으로 스릅스카 공화국의 기지를 폭격하며 개입하면서 전쟁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보스니아 전쟁은 19951214일 파리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평화를 위한 기본준비협정이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19951121일에는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셔 최종 평화 협정인 데이턴 협정을 맺었다.[19]

 

20171231일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이 문을 닫기 전까지 보스니아 전쟁에서 일어난 전쟁 범죄로 세르비아인 81, 크로아티아인 24, 보스니아인 9명이 기소되었다.[20] 가장 최근의 추정에서는 보스니아 전쟁으로 10만명이 사망하였다. 또한 220만명 이상이 실향민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파괴적인 분쟁으로 기록되었다. 또한 전쟁 기간 대략 12,000명에서 50,000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강간을 당했으며, 피해자 중 절대다수가 보스니아인 무슬림교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