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타이 칸국은 칭기즈 칸에게 상속받은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칸국으로 정작 오고타이와 그의 아들 구육는 몽골 제국 자체의 대칸이었기 때문에 이 땅과 그다지 접점도 없고 가본 적도 거의 없다.
대신 오고타이 칸의 5남인 카시의 아들로 태어난 카이두가 실질적 초대 칸으로 지배했다.
1241년 오고타이이 칸이 죽은 이후 대칸 지위를 두고 구육 칸과 바투가 다투고, 구육 칸이 1246년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 지위에 올랐으나, 1248년 구육 칸이 사망하자 바투 계와 연합한 툴루이 계와 오고타이계가 다시 대칸 지위를 두고 다투다가 툴루이 계의 몽케 칸이 1251년 대칸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몽케 칸 즉위 직후 오고타이칸 계열이 대칸 지위를 되찾기 위한 위한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대거 숙청당했을 때 몽케 칸에게 고개를 숙여 목숨을 건지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오게 된다.
1259년 몽케 칸 사망 이후 쿠빌라이 칸과 아릭부케(툴루이와 소르칵타니의 막내아들이다. 형제는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등이 있다.)가 대칸 지위를 두고 다투자, 카이두는 아릭부케를 지지했다. 그리고 아릭부케가 결국 쿠빌라이에게 패배하게 되자, 쿠빌라이를 지지한 차가타이 칸국의 알루구 칸(재위 : 1260년 ~ 1266년)이 본격적으로 카이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킵차크 칸국이 도움을 주어서 차가타이 칸국의 공격을 막아내고, 차가타이 칸국에서 바락이 즉위하자 도리어 차가타이 칸국을 킵차크 칸국과 함께 압박하였고, 두 차례의 승리를 이끌면서 차가타이 칸국의 상당한 영토를 얻으면서 강화를 맺게 된다.
한편 영토를 잃은 바락은 상당한 불만을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불만을 이용해 바락으로 하여금 일 칸국을 공격하게 만들고, 바락은 일 칸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그의 성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킵차크 칸국은 그를 압박하게 되고, 1270년 일 칸국에게 대패한 바락이 1271년 카이두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도리어 포위를 당하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 결국 바락은 카이두의 군대에게 둘러싸인 상태의 막사 안에서 죽게 된다. 이후 차가타이 칸국에 새로운 칸을 올렸으나, 이전 칸들의 아들들의 반란에 시달리고, 이러한 반란은 1282년 카이두가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 두아를 칸 위에 올리면서 해결이 된다.
평소 카이두를 탐탁치 않아 했던 쿠빌라이는 넷째 아들 노무간으로 하여금 카이두를 공격하게 하였고, 여기에는 몽케의 아들 시리기, 아리크부카의 아들 요부쿠르, 멜릭 테무르가 있었는데, 1276년 세 왕자가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킵차크 칸국에 넘겨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 그리고 이 왕자들 사이에 차가타이의 차남 사르반도 합류하게 된다. 이 왕자들과 킵차크 칸국, 카이두가 반 쿠빌라이 전선을 구축하고 원나라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진격하였고, 쿠빌라이는 바얀으로 하여금 이 진격을 막아내게 하였다.
이후 카이두는 지속적으로 원나라를 괴롭혔다. 하지만 번번히 바얀의 방어에게 막혔고, 쿠빌라이 사후에는 오히려 본인 진중에 있던 세력들이 이탈해 감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그래도 원나라 공격을 멈추지 않아서 1298년에는 원 성종의 사위 쾨르기즈를 생포하여 처형하기도 한다.
자신의 세력이 줄어드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카이두는 1301년 최대 규모 원정에 나서게 된다. 처음에는 카말라(원 진종의 아버지)의 군대를 압도했지만, 곧바로 투입된 카이샨(이후의 원 무종)의 군대로 인해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카이두도 전장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
카이두 사후 차카타이 울루스의 칸 두아는 카이두의 유언대로 카이두의 둘째 아들 오르스를 옹립하지 않고 첫째 아들 차파르를 지지해 둘 간의 분쟁을 유도했다. 두아의 지지 덕분에 차파르는 2년 뒤인 1303년에 동생 오르스를 물리치고 칸위에 올랐다. 칸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304년(혹은 1305년)에 차파르는 두아의 제의에 따라 전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평화 협정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306년에 차파르와 차가다인 울루스 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차가타이 울루스는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유린했고 칸 울루스가 차가다인 울루스를 지원하고 나서자 차파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차커타이 울루스에 항복했다.
차파르의 항복을 받아낸 두아는 카안 울루스와 함께 오고타이 울루스의 영토를 분할한 뒤 차파르에게 작은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두아는 차파르에게 영지를 준 지 얼마 안 돼 차파르를 쫓아내고 그의 동생인 얀기차르와 투그메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다.
두아가 1307년에 죽고 차가다인 울루스 칸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이자 카이두의 네 아들 차파르, 오르스, 얀기차르, 투그메는 힘을 모아 131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이끄는 반란군은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고 이 패배 이후 차파르가 쿠빌라이 카안의 아들이자 몽골제국 6대 칸인 테뮈르 카안에게 투항하면서 오고타이계 울루스들은 마침내 칸 울루스에 완전히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