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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통일과 가리발디

frog.ko 2020. 12. 28. 10:52

이탈리아는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동고트족, 롬바르드족, 동로마제국, 프랑크왕국, 신성로마제국의 연이은 침략을 받으며 북부엔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공국, 제노바 공국, 남쪽엔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중부엔 교황령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특히 주변강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스페인이 고대로마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탈리아를 수시로 침공해왔다. 통일직전 이탈리아는 북부엔 합스부르크 종가인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있었고, 남부는 부르봉왕가가 지배했다.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은 대체로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고 빈 체제가 시작된 1815년부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난 1871년까지로 보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은 비토리아 에마뉴엘 2,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 등 네명을 꼽을수 있다.

 

에마뉴엘 2세는 이탈리아 북서부의 사르데냐-피에몬테(Sardegna-Piemonte) 국왕으로, 성격과 이념이 다른 카보우르, 가리발디를 고루 등용하는 용병술을 지녔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주변 강국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응한 현실주의자였다.

 

카보우르는 귀족출신으로 사르데냐의 재상을 맡아 국제적 역학관계를 냉철하게 파악해 움직이는 외교전략가였다. 그는 합스부르크가의 종가인 오스트리아와 앙숙관계였던 프랑스를 끌어들여 롬바르디아를 차지해 북부 이탈리아를 손아귀에 넣었다.

 

가리발디는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해 사르데냐 국왕에게 바쳤다. 그는 공화주의자였지만 현실적으로 사르데냐의 통일을 인정했다.

 

이에 비해 마치니는 철저한 공화주의자로 사르데냐의 통일에 불복하면서 이탈리아 통일 이념을 불어넣은 운동가였다.

 

가리발디는 1792년 사르데냐 왕국 니스에서 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사르데냐 왕국은 나폴레옹한테 밀려 사르데냐 섬으로 도망친 상황이었고 니스를 비롯한 피에몬테 지방은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당한 상태였기에 출생 당시의 이름은 프랑스식인 조제프마리 가리발디였다.

 

가리발디 자신도 10년 넘게 선원으로 일하다 1832년 상선의 선장 자격을 얻었다. 1833~34년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의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위대한 선구자였던 주세페 마치니와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가인 생 시몽 백작의 영향을 받았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인 주세페 마치니의 지지자로, 청년 이탈리아당 운동으로 대표되는 공화제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1834년 피에몬테에서 공화파 혁명을 일으킬 목적으로 반란에 가담했으나 반란 음모가 실패하자 프랑스로 도망쳤다.

 

망명자로 지내면서 여러 차례의 전쟁에 참여하여 게릴라 전술을 익혔다. 1835년 브라질에서 그는 라가머핀이라고 알려진 반군에 합류하여 히우그란지 공화국이 산타 카타리나에서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하는 것을 도왔다.

 

가리발디는 우루과이 내전에도 참여하여, 붉은셔츠라고 알려진 이탈리아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오늘날 우루과이 독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기려지고 있다.

 

군인과 혁명가로서의 이름을 올리고 있던 가운데 그는 조국의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1848년 귀국한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이 롬바르디아를 장악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나 1860년 그의 고향이었던 니스와 사보이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이에 반발, 비정규군을 소집해 프랑스령 니스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8605월 그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모험을 감행해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정복했다.

 

그가 조직한 붉은 셔츠단의 유명세는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무혈개선을 했을 정도였다. 붉은 셔츠단은 민병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철 같은 군기를 자랑했고 행군 도중 길가의 오렌지 나무에 열린 오렌지 1알조차 따먹지 않았을 만큼 대민피해 방지에 철저했다고 한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리발디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남부 이탈리아의 독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르데냐 왕국의 카보우르 역시 가리발디가 직접 왕이 되려 하거나 최소한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가리발디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두말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점령지 전체를 헌납했다.

 

이후 카프레라 섬으로 물러났으나, 로마 병합이 지지부진하자 1862년과 1867년에 팔레르모에서 군대를 조직해 로마 탈취를 시도하였다가 실패, 카프레라섬에 다시 연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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