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인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이다. 최초의 거주지가 동부 스웨덴 지역이었던 이들은 1세기경에 발트 해안과 비스와 강 유역으로 옮겨 왔다.
스칸디나비아에 남은 일파는 기트족으로 불렸고, 남하한 고트족은 슬라브족과 바스타르네 인들의 뒤를 따라서 로마 제국의 변경(邊境)에까지 이르렀다. 3세기경에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으로 나뉘었다.
이름에서 파생된 고딕(Gothic) 양식이란 역사, 문화 용어로도 남아 있으며 르네상스 시대 이전 북유럽 성당 양식을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세련되지 못했던 고트족에 빗대어 고딕 양식이라 일컬었으니 그리 좋은 표현은 아니다.
지금의 예텔란드 섬과 스웨덴 남부인 예탈란드 지방에 살았던 기트족이 고트족의 원류라는 말이 있지만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기트족이 고트족인지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원래는 지금의 폴란드나 발트해 연안에 살던 민족으로 추정된다. 이후 로마 영내를 침범할 무렵에는 오늘날의 루마니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트족은 동서로 나뉘어 각자 독자 발전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후일 서고트족(Visigoths)과 동고트족(Ostrogoths)으로 따로 일컬어진다. 참고로 동서 구별은 잘못된 편견이다. Ostrogoth는 본래 해안지대의 그레우퉁기족이며 이들을 '고귀한'이라는 뜻의 ostro라고 불렀다. 그리고 Visigoth는 본래 삼림의 테르빙기족이며 이들을 '선한'이라는 뜻의 'visi'로 불렀다. 즉 ostrogoth, visigoth 구별에 동서 방향적 의미는 전혀 없다.
본격적인 영향은 기원후 4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 온 훈족에게 밀려 로마 영내로 이주하게 되면서부터. 이 와중에 동고트는 370년경 일시로 멸망하고 서고트족은 376년 도나우강을 건너 로마 제국 영내로 들어온 후 수십 년에 걸쳐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갈리아(프랑스)를 거쳐 히스파니아(스페인)까지 먼 걸음을 하게 된다.
로마는 최초에는 이들을 받아들여 북방 국경 안정화와 국경지대 경제 활성화라는 토끼 두 마리를 동시에 잡으려 했지만, 부정부패로 말미암은 삽질로 서고트족은 일부 동고트족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버린다. 결국 고트족의 지도자였던 프리티게른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하여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심지어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발렌스와 동로마군의 고위 및 중간급 장군진, 그리고 주력 야전군의 3분의 2가 이 싸움에서 모두 전사했을 지경이었다.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을 간신히 제압하는 듯했으나, 때마침 사산조 페르시아와 긴장이 고조되면서 결국 동맹 협정을 맺어 고트족을 로마 영내에 아예 정착할 수 있게 허용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야만족이라 멸시하던 이들을 물리치기는커녕 동맹 상대로 승인하고 국내 거주까지 허용했다.
이후 서고트족은 판노니아에 정착하고 동맹 부족으로 로마 제국에 상당 기간 봉사했다. 그러나 대제 테오도시우스 사후 제국이 영구 분열되자 빠른 태세전환, 콘스탄티노플 성벽 때문에 공략이 힘든 동로마보다는 서로마를 공략하기 시작하지만 스틸리코에게 패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마침내 410년 족장 알라리크(Alaric)의 지휘 아래 로마를 점령, 약탈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이후 서로마에 의해 아퀴타니아[현대 프랑스의 아키텐 지방이며 보르도와 그 일대]를 할당받아 동맹자로 정착한 후 아틸라와의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마의 동맹군으로 참여해 왕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훈족을 물리치기도 했다. 450년대 이후 서로마가 더욱 막장이 되자 주변 속주를 본격적으로 공격, 남서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에도 진출하여 잔여 서로마 지역을 차지하고 이 지역의 맹주로 있던 수에비족을 반도 북서쪽으로 축출해 버린다.
5세기 중엽 훈족의 왕 아틸라가 죽고, 훈족이 몰락한 판노니아에 정착했던 동고트족은 테오도리크 대왕이 즉위한 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를 점유한 오도아케르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이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한 서로마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고트 왕국이다.
서고트는 507년 부예 전투에서 경쟁 부족 프랑크 왕 클로비스에게 처참히 패배하고 왕 알라릭 2세까지 전사해버렸다. 이로 인해 셉티마니아(남프랑스 연안)를 제외한 오늘날 프랑스 방면의 영토를 잃고[12] 서고트는 이베리아 반도로 피난해 권토중래하여 세력을 다시 모았다. 이때 즉위한 어린 왕을 대신해서 동고트 족의 테오도리크 대왕이 섭정을 하기도 했고 그 후엔 내분에 휘말려 이베리아 반도 남부를 동로마 제국에 내주는 등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반세기 동안 힘을 결집하여 최종적으로 수에비 왕국 및 잡다한 이베리아 북부의 민족들과 남부의 동로마 세력을 전부 물리치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왕권 투쟁은 여전했다. 결국 100여 년 뒤인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침공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나 잔존 세력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국, 후에 이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갈라진 여러 왕국들이 다시 통일되고 레콘키스타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 스페인 제국으로 발전한다.
한편 이탈리아 본토에서 군림하던 동고트 왕국은 테오도리크 대왕 치세에 로마인과 동고트인이 1국 2체제 형식으로 평화롭게 잘 지냈으나 526년 그가 사망하면서 몰락이 시작된다. 그의 외손자인 아탈라릭(Athalaric)이 후임 왕으로 즉위했으나 즉위 당시 나이가 10살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친이자 테오도리크의 딸이었던 아말라순타(Amalasuntha)가 섭정을 하였다. 아탈라릭은 즉위 8년 만인 534년에 사망했고 아말라순타는 여왕으로 즉위한 후 공동왕으로 테오도리쿠스의 조카 테오다하드(Theodahad)를 임명했는데 오히려 테오다하드의 계략에 말려 죽음을 당한다. 동로마 제국은 이를 구실로 535년 동고트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후 이탈리아와 달마티아, 판노니아에서는 '고트 전쟁'이라고 불리는 18년간의 전쟁이 벌어진 끝에 결국 동고트 왕국은 553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보낸 나르세스에게 멸망당했다.
이후 적지 않은 동고트인들이 아나톨리아로 끌려가 대(對) 페르시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일부는 고토그라이키란 부대로 편성되어 동로마 제국의 핵심 정예 부대로 탈바꿈했다. 대 이슬람 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소수 부족 가운데 불가르족의 경우는 적지 않은 수가 탈영하거나 이슬람에 붙어서 배신을 했던 반면, 동고트 병사들은 의외로 동로마 제국을 잘 섬겼다. 이탈리아에 그대로 남은 동고트족은 동로마의 정규군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랑고바르드족과 싸워서 이들의 이탈리아 침공을 막아냈다. 그나마 이탈리아 내에서 로마 영토와 로마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동고트족 출신 군인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등으로 전출당해 편성된 동고트인들의 부대는 훗날 옵티마테스 부대로 개명되었는데, 이슬람 제국의 맹공 때문에 제국이 어려울 때에도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시해하는 등의 부작용을 일으켰다. 이들이 적에게 투항하지는 않았지만 대우를 시원찮게 하는 황제를 곧잘 죽여서 콘스탄티누스 5세 때에는 전투 부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종합하면 이탈리아와 아르메니아, 발칸 반도의 동고트인들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서고트 왕국이 이슬람에게 멸망한 후 정체성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국 동로마 제국에 융화된 것으로 보인다.
본토에 남아 있던 기트족은 11세기경 스웨덴 왕국의 성립 이후로 북쪽의 스베아족과 점차 융합하여 스웨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성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고트족의 이름은 현재 스웨덴 본토의 지명인 예탈란드(Götaland)와 고틀란드섬(Gotland)에만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로 훈족의 침공 당시 크림 반도에도 고트족이 거주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크림 반도의 고트족은 훈족, 아바르족, 동로마 제국, 제노바인들에게 지배받았지만, 18세기까지 근근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곳을 장악한 러시아의 동화정책으로 소멸해 버렸다.
▣수에비족은 기원전 58년 당시 갈리아 원정 중이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당시 수에비 족장이던 아리오비스투스는 카이사르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로마군과 대등히 싸웠다고 전해진다. 수에비족은 주로 라인강 상류 지대에 거주했는데 지금도 독일 남서부를 일컫는 지명인 슈바벤(Schwaben)의 어원이 되었다.
1세기 초반 수에비 연맹에 속해 있던 마르코만니 족은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괴멸시킨) 아르미니우스와 싸워 패배했지만 그가 로마에게 패퇴한 후 세력을 회복했다. 2세기 중반 수에비 연맹의 마르코만니와 콰디족은 로마 제국을 침공하고 5현제의 마지막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대결하기도 했다. 그리고 3세기에 수에비 연맹은(당시에는 알레만니 혹은 알라만으로 불렸다.) 마인 강 연안에 정착했다.
이것은 로마 시대 일부 기록으로 추측해 본 가설일 뿐 수에비족의 범위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다. 확실한 것은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고 로마인들이 게르만이라 칭한 부족은 고트족을 제외하면 십중팔구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후에 이탈리아로 진출하는 랑고바르드족도 수에비의 한 갈래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발트 지역에서 게르마니아로 이주해 온 민족들을 통틀어 수에비로 칭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해 수에비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반달족(Vandals)은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로, 오늘날 폴란드 남부 지역에서 거주했던 것으로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후 유럽 여기저기로 이동하여 서기 5세기에는 스페인과 북아프리카에 성공적으로 왕국을 세웠다.
반달족은 당시 거의 대부분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로 개종해 있었다. 406년, 반달족은 별 어려움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밀려왔고 라인강 유역의 갈리아 북부에서 이미 로마화 되어있던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았다. 2만 명의 반달족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해 겨울 라인강이 얼자, 반달족은 대거 라인강을 넘었고 갈리아를 남하하면서 황폐화 시키고 아키텐까지 밀려갔다. 409년 반달족은 계속 남진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지금의 에스파냐)로 들어갔다.
히스파니아에 이미 정착해 있던 로마 제국의 푀데라티 부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반달족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혔고 결국 알란족을 굴복시키고 정착하였다. 반달족의 족장 군데리크는 알란족의 왕의 직위를 얻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정착한 반달족은 바이킹족처럼 해적으로 변신했고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기도 했다.
429년 군데리크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가이세리크는 함대를 조직하여 약 8만명의 반달족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 성을 포위하고 14개월에 걸쳐 공성전을 벌였고 결국 함락시켰다. 이때 북아프리카교회의 지도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도 히포 레기우스 성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리우스파 이단자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으나, 결국 함락되기 직전 성안에서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열병에 걸려 죽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반달족은 435년 로마와 평화협정을 맺어 동맹을 맺었으나 가이세리크는 곧 동맹을 깨고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 왕국을 세웠다. 이후 35년 동안 가이세리크의 반달 왕국은 대규모 함선을 조직하고 지중해 연안의 로마 제국 영토를 차례로 침략해 점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