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의 로마 제국을 일컫는다.
AD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멸망하고 라틴 제국으로 대체되었으나,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아 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후 쇠락을 거듭하여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국에게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흔히 '동로마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하는데, 동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서로마 제국과 구분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로마 제국의 중세 시기를 고대 로마와 구분하기 위해 쓰인다.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함께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나라이며, 당대에는 이를 단절로 보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은 엄밀히 말하는 분열이 아니라 '분할'로, 실제 제국이 분열되어 서로를 별개의 국가로 여긴 것이 아니라,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둘로 나누어 복수의 황제가 다스린 개념이었기에, 고대의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별개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동로마처럼 로마 제국과 한 나라인 서로마 제국이 존재했기에 구분을 이유로 '동'로마라고 부를 수는 있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근세에 중세의 로마 제국을 고대의 로마 제국과 구별하기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며, 정확히 어떤 시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성립되었는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마 제국과 같은 국가로 인정한다면 기원전 753년이 맞겠지만, 굳이 별개의 제국으로 치는 경우엔 대체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년 ~ 337년)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인정하고 330년 5월 11일에 비잔티움을 '노바 로마'로 개명하고 수도로 삼은 이후부터의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구별해 부른다.
제국의 국경은 여러 차례 변화했으며 쇠퇴와 수복의 순환된 과정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제국은 역사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서지중해 일대를 회복함으로써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이 때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안달루시아,시칠리아,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2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 유스티아누스 1세 사후 사산 제국과 제국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자원은 소모되었고, 이로 인해 7세기의 초기 무슬림 정복전쟁 당시 제국이 상당한 영토를 잃는 원인이 되었다.
이슬람 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이집트, 시리아와 같은 부유한 속주들을 상실했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제국은 다시 팽창했고, 2세기 동안 지속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특히 바실리오스 2세로 대표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확장기에 제국의 영토는 발칸 반도대부분과 남이탈리아, 크레타, 키프로스,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까지 넓혀져 7세기 이후 최대 강역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 이후 시작된 내란과 급변하는 중동의 정세에 대처하지 못한 두카스 왕조의 황제들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하여 소아시아를 잃게 되었다. 이후 튀르크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게될 발판을 마련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부터 시작된 콤니노스 왕조 이후 제국은 다시 부흥했으며, 12세기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 그 정점인 마누일 1세의 치세에 제국의 경제력은 절정에 달했고 이때 제국의 영향권은 발칸 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대부분, 그리고 키프로스와 크레타,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도 절대 오래가지 못했다.
앙겔로스 왕조 황제들의 무능과 내전으로 국력이 약화된 제국은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플이 약탈당하고 함락되었으며, 옛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계 국가들과 라틴 제국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은 회복되었으나, 이미 그 영향력은 상당히 쇠퇴되었다. 미하일 8세와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아나톨리아의 잔존 영토로 밀려들어오는 투르크족을 막지 못했다.
또한 계속되는 내전도 비잔티움 제국을 방해했다. 결국 14세기 이후 제국의 영토는 트라키아와 그리스 일대로 축소되었고, 요안니스 5세의 치세를 거치며 완전히 몰락하여 콘스탄티노플과 테살로니카, 모레아만이 영토로 남은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완전히 멸망했다. 비잔틴 제국의 계승 국가였던 트레비존드 제국은 1461년 트레비존드 포위전으로 멸망했다.
동로마는 동로마 황제가 가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이 단지 이름만 따온 것이 아닌 고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유구한 역사와 막강한 권위를 가진 '로마 황제'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음은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을 막론한 유럽 세계 전체가 입맛 다시며 호시탐탐 이를 노렸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서방 가톨릭 국가들을 제외한 여타 세력에게는 어느 놈이 되든 관심이 없었던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황제' 직함과는 그 대접이 하늘과 땅 차이다.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시메온 1세와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우로슈 4세가 자기네 직함에다가 '로마 황제'라는 타이틀을 붙였던 것도 동로마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을 단행한 데서 기인했으며, 오스만국의 메흐메트 2세의 '로마 황제' 자칭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대업을 이룬 데서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 세력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 라틴 제국의 황제들이 자기네 인장(seal)에다가 '로마 황제(IMP(e)R'(ator) ROM(anorum))'라고 박아놓은 것도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열거한 세력들이 '로마 황제'를 자칭하며 스스로를 '제국'으로 선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른 국가도 아닌 바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정복이었다. 당대 유럽 세계에서 '제국'이나 '황제'라는 개념은 어떤 형태로든('자칭'이거나(세르비아, 러시아) '동로마 제국의 인정'을 받았거나(신성로마, 불가리아)) 동로마 제국과 연결 고리가 있었던 것들이다.
애당초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황제 즉위도 여성의 제위 승계를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법상 당시 동로마를 다스렸던 이리니를 황제로 취급하지 않은 채 로마 황제가 공석 상태임을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리니의 선황, 다시 말해서 콘스탄티노스 6세까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가 정통 로마 황제'임을 서유럽인들 역시 인정했다.
그러나 살리카법이라는 것이 프랑크 왕국의 국내법에 불과했기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는 이리니와의 혼인을 통해 당대 유럽 세계에서 진정한 로마 황제로 경외되어 온 동로마 황제 자리마저 노림으로써 자기가 가진 로마 황제 직함의 '국제적인' 정통성에 쐐기를 박고자 했다.
사실 카롤루스의 로마 황제 즉위의 진정한 수혜자는 카롤루스 본인이 아닌 로마 교황이었는데, 카롤루스에게 '로마 황제'의 권위를 부여한 주체가 교황이었으니 이를 거두는 것 역시 교황이 결정할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교황은 황제의 정통성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이 오히려 교황이 채워 놓은 족쇄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안 카롤루스로서는 굳이 교황에게 설설 기지 않아도 큰소리를 칠 수 있을 만큼의 독보적인 정통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정통 로마 황제'인 동로마 황제로의 즉위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 충족시키기에 너무나도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리니와의 혼담 논의는 동로마 황제 등극이라는 최종 목표의 중간 과정이었던 것이다. 훗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동로마 황족과의 혼인을 이유로 로마 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한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카롤루스의 구상이 아주 허황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서방의 로마 황제조차도 그 탄생은 동로마 남성 황제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겉으로는 자기가 진짜 로마 황제라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정통성 강화의 수단으로 동로마 황제 자리를 노렸다는 것에서 '동로마 황제가 진퉁 로마 황제'임을 서방 세력 스스로가 몸소 보여 주었다.
동로마가 멸망하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로서 황제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 사람은 안드레아스의 누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했고 이 사람들의 손자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러시아의 차르가 되었다.(이 말은 카이사르를 뜻하고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슬라브인들이 로마 제국 황제를 일컫는 말이었다) 이반 황제의 후계자들은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생각을 지지했다. 러시아 제국이 세 번째 로마라는 관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존재했다.
중세 시대에까지 존재했던 로마 제국은 천년 제국 또는 중세 로마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후에 그리스나 로마를 정복한 오스만 투르크 조차도 자신들을 로마의 후계자, 로마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역시 로마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 것을 근거로 자신들을 제3의 로마, 근대 로마라 칭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 유일하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 나라인 로마 제국은 서유럽과 동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이민족에게 공격받은 로마 제국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서유럽은 페르시아, 아랍,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한동안 오스만 제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가령 로마와 아랍의 전쟁 덕분에 샤를마뉴가 부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카를 마르텔이 투르-푸아티에에서 사라센 족을 격파한 것도 로마가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로마 제국이 유지한 고대 로마 제국의 각지역 속주와 지방 파견한 파트리키우스 등은 봉건 제도와 자급자족 경제를 크게 자극했다고도 주장한다.
수백년간 서방 사가들은 '비잔티움다운', '비잔티움주의'라는 말을 '쇠퇴, 믿을 수 없는 정치, 복잡한 관료제'를 뜻하는 말로 썼으며, 이 말 속에는 로마 문명과 남동부 유럽의 로마가 남긴 유산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비잔티움주의(Byzantinism)이라는 말은 일반으로 종교ㆍ정치ㆍ철학 등에서 서방의 것과 반대되는 태도를 정의하는 표현이나 20세기와 21세기에는 서방 사가들이 로마 제국이 서방에 끼친 영향을 위시해 더 균형잡히고 정확한 방법으로 이것들을 이해하려는 듯하여 로마 문화의 복잡한 성격이 더욱 관심받으면서 전보다 더욱 객관으로 평가된다.
▣ 간추린 로마사
●건국: 기원전 753년
●공화정 시작: 기원전 509년
●포에니 전쟁: 기원전 240~150년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기원전 50년경
●제정 시작: 기원전 27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즉위: 28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 즉위: 306년
●테오도시우스 대제 즉위: 379년
●최종 분할 통치: 395년.
●서방 영토 상실: 476년.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성립: 518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치세: 527년~565년
●이슬람이 제국의 절반 이상을 휩쓴 시기: 7세기
●20년간의 혼란: 695년 ~ 717년
●이슬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실패: 717년
●성상 파괴 운동: 8 ~ 9세기
●마케도니아 왕조의 성립: 867년
●안티오크 수복: 969년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 976년부터 1025년까지.
●불가리아 정복: 1018년
●동서 교회 대분열: 1054년
●콤니노스 왕조 성립: 1057년
●만지케르트 전투, 소아시아 상실: 1071년
●알렉시오스 1세 즉위: 1081년
●마누일 대제 붕어: 1180년
●콤니노스 왕조 몰락: 1185년
●제4차 십자군 원정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3세기, 1204년.
●니케아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13세기, 1261년.
●로마 제국 멸망: 15세기, 1453년.
참고: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