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호(揚武號)는 한국 최초로 도입한 근대식 군함이자 최초의 기선형 군함이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3년에 들여왔다. 대한제국의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고종이 들여온 군함으로 길이는 105미터, 무게는 3432톤으로 당시 적지 않은 크기의 선박이다.
그러나 그 크기에 비해, 무장은 대포(80mm) 4문과 총(5mm) 2정에 불과한데, 원래 이 배는 군함을 목적으로 만들어 진 배가 아니었다.
원래 이 선박은 영국의 딕슨사에서 건조한 팰러스(Pallas)호를 일본 미쓰이 물산이 1894년 25만엔에 구입해 9년간 사용한 석탄 운반선인데, 이를 1903년에 조선 정부가 구조 수리비를 포함하여 총 판매가 55만엔(대한제국 돈 110만원)에 구입해 동년 4월 15일 인천에 입항한 이 석탄 운반선에 대포(80mm) 4문과 소포(5mm) 2문을 장착하는 등 전투용으로 개조하여 군함으로 사용하였다.
미쓰이 물산은 현재 미쓰이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중역 회의록에 위와 같이 밝히고 있으며, "배가 워낙 커서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석탄선으로 쓰기에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대한제국 정부에 판매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10만원은 전체 400만원이 조금 넘는 군예산의 약 30%였고, 1903년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총 예산이 1000만원이 약간 넘었던 것에 비하면 구매가가 정부 예산의 10%가 넘으니 고종이 무리수를 두어 구매를 강행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고종은 군함 구입 전에 근대식 항해술을 익힐 사람들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영국에서 교관까지 모셔오며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했지만 이마저도 일본의 방해로 얼마 못가 문을 닫았다. 결국 배도 군함 같지도 않은 배를 넘겨받고 실질적으로 군함을 몰 인원도 제대로 양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제 구실 한번 못하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무장해제된 후 선원실습선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러일전쟁 때 일본이 이 배를 징발해 지원함으로만 썼는데, 잠시 신형 엔진으로 교체해 쓰다가 전쟁이 끝난 후 기술유출을 염려해 다시 원엔진인 구형엔진으로 교체해 대한제국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한일합방을 앞둔 1909년에는 일본 하라다상점(原田商店)의 계열 해운사인 하라다 기선에 4만2천엔에 매각되었고[10] 이후에도 화물선으로 소소히 쓰이다가 1916년에 일본의 철광석 운반선으로 철광석을 싣고 싱가포르로 가는 도중에 침몰했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은 광제호라는 군함을 일본에서 들여온다. 왜 일본에게 그렇게 당해놓고 또 일본에서 들이나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이 서양에서 군함을 도입할 길을 끊어 놓았기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이 배도 무장이 크진 않았으나 그나마 새 배였고, 이 배에도 마찬가지로 신순성 선장이 내정된다. 하지만 광제호 역시 제대로 쓰지 못하고 한일합방 후 일본이 제멋대로 굴리다 광복 이후엔 일본인들을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데 쓰이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자취를 감춘다.
이후 1949년에 대한민국 해군은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으로부터 도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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