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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기원이 되는 나라'아스투리아스'

frog.ko 2021. 1. 26. 12:42

아스투리아스 왕국(718년 ~ 924년)은 스페인 북서부지방에 존속했었던 기독교 국가이다.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기원이 되는 나라이다.

 

아랍인과 베르베르족의 침입 전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있던 다수의 서고트 귀족과 그 추종자는 아스투리아스 산중으로 퇴각해 서고트의 왕자 펠라요(718~737경 재위)를 국왕으로 선정했다.

 

알폰소 1(739~757 재위)는 갈리시아를 신왕국으로 합병했으며, 그뒤 여러 왕은 산간지방에서 중앙 평야로 진출하고 남부에서도 군사상 성공을 거두었다. 아스투리아스 최대의 왕 알폰소 3(866~911 재위)는 영토를 넓혔으며, 가르시아 1(910~914 재위)는 수도를 오비에도로부터 레온으로 옮겼다.

 

이후 가르시아의 후계자들은 아스투리아스의 왕이라는 칭호 대신 레온 왕이라는 칭호를 즐겨 쓰기 시작했다. 아스투리아스의 여러 왕은 서고트 왕국의 전통적인 계승자를 자임하고 스페인 국토회복운동을 이루고자 했다.

 

백작령이던 카스티야는 페르난 곤살레스 백작(930~970 재위) 때 사실상의 독립을 이룩했다. 이후 카스티야의 혁신적인 경향과 레온의 보수적인 전통이 충돌하게 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그리스도교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결과 레온은 칼리프의 주권을 인정해야 했고, 988년에는 만수르의 침입을 받아 레온 시는 파괴되었다. 그후 나바라 왕 산초 3세가 카스티야 지방을 점령한 뒤 레온 왕국의 동부를 점령해 '스페인 황제'의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레온 왕국의 독립을 위협했다.

 

나바라 왕국은 초기에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출범, 이미 10세기부터는 국토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에브로 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대했다.

 

산초 3세 대왕(1000~35 재위) 때는 카스티야·레온·소브라르베·바르셀로나 등을 지배하여 이베리아 반도 최강의 왕국이 되었다. 산초 대왕은 제국을 개인 재산으로 여겨 제국을 아들 4명에게 분할해 넘겨주는 유언을 남겼다. 장남 가르시아 4세는 나바라를 물려받았으며, 둘째아들 페르난도는 왕국으로 승격된 카스티야를 물려받고, 셋째아들은 소브라르베와 리바르고르사를 물려받았다.

 

아라곤은 넷째아들 라미로 1(1035~63 재위)에 주어져 왕국이 되었다. 라미로는 소브라르베와 리바르고르사를 아라곤 왕국에 병합했고, 이때부터 아라곤은 독립된 역사를 시작했다.

 

1039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1035~65 재위)는 레온을 정식으로 합병하는 등 국경을 더욱 확대했다. 페르난도의 사후 영토에 대한 분쟁이 있었으나 결국 둘째아들 알폰소 6(1065~1109 재위)가 전영토를 통일했다.

 

알폰소는 톨레도의 이슬람 왕국을 1085년에 정복하고, 또 문화적으로 앞선 모사라베(이슬람의 스페인 정복 후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조건으로 신앙이 허용된 그리스도교도)나 유대인, 고도의 기술을 가진 수많은 이슬람 수공업자, 농민 등을 흡수해 카스티야 왕국의 인종적·문화적 구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스도교도의 통치하에서 이와 같은 변화는 스페인 이슬람 문명을 낳게 했다. 한편 알폰소의 비() 브루고뉴의 콘스탄사의 영향으로 프랑스의 클뤼니의 수도사가 스페인의 교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mudejares)에 대한 관용 정책을 포기하도록 알폰소에게 압력을 넣어 스페인의 교회를 로마 교회에 한층 접근시켰다. 카스티야레온의 알폰소 7(1126~57 재위)는 세력을 크게 떨쳐 1135년에는 '스페인 황제'의 칭호를 획득했다. 알폰소 7세는 국토를 분할하여 카스티야를 큰아들 산초 3세에게, 레온을 페르난도 2세에게 상속했는데, 이때문에 카스티야와 레온은 73년 동안 분리된 채 호족들의 무정부적인 당파 싸움이 계속되었고 스페인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레온 왕 알폰소 9세의 아들이자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의 외손자인 페르난도 3세가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한(1217) 이후, 1230년 부왕의 뒤를 이어 레온의 왕이 됨으로써 카스티야와 레온은 영구 통합되었다.(*카스티야레온 왕국(1252~1479)

 

나바라 왕 산초 대왕의 유언에 따라 성립된 아라곤 왕국은 산초 1세 라미레스(1063~94 재위) 치세 때 나바라를 합병해 세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알폰소 1(1104~34 재위)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나바라인과 아라곤인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나바라는 아라곤 왕국에서 다시 분리되었다. 얼마 후 아라곤 왕국의 공주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가 결혼해 알폰소 2(1162~96 재위)를 낳았다. 그가 아라곤 왕위에 오르고 바르셀로나 백작위를 받게됨으로써 아라곤과 카탈루냐를 실질적으로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알폰소 10(1252~84 재위) 때는 정치적으로 불운한 시대로서 카스티야는 포르투갈·아라곤·나바라와의 전쟁에 말려들었다.

 

1275년 맏아들 페르난도가 죽자 정치투쟁이 시작되어 고위 성직자와 귀족은 연합해 알폰소 10세의 퇴위를 꾸몄으며, 이로써 2세기 동안 계속되어온 귀족과 국왕의 충돌기가 시작되었다(세르다). 산초 4(1284~95 재위)의 손자 알폰소 11(1312~50 재위)는 자치도시의회(concejo) 군대의 지지를 받으면서 귀족들을 탄압함으로써 절대주의를 어느 정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사이의 왕권 다툼으로 카스티야는 일대 혼란에 빠져들었다. 서자 가운데 장자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는 적자인 잔인왕 페드로(1350~69 재위)19년간의 왕위 투쟁 끝에 1371년 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와 같이 왕위를 둘러싼 장기간의 싸움 과정에서 카스티야는 프랑스와 긴밀한 정치·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해군을 동원해 잉글랜드의 남해안을 위협했다. 한편 이렇게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엔리케와 그의 아들 후안 1(1379~90 재위)는 여러 번 코르테스(신분제의회)의 도시대표에게 재정적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도시대표는 정부에 대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후안 1세 치세 때 왕국은 재정적·군사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에 빠졌지만 프랑스의 군사원조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엔리케 4(1454~74 재위) 때 궁정은 더욱 피폐해졌으며, 왕이 죽은 뒤에 왕녀 후아나와 엔리케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내란이 일어나 카스티야는 정치적·경제적·도덕적으로 쇠퇴했다. 마침내 내란에서 승리한 이사벨은 이사벨 1(1474~1504 재위)로 왕위를 계승했다. 한편 이사벨은 왕위에 오르기 전 1469년에 아라곤의 왕위계승자인 페르난도와 결혼함으로써 두 왕국은 통합되게 되었다.

 

750년 무렵의 이베리아 반도 녹색 지역이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
814년의 이베리아 반도
910년의 이베리아 반도
1037년의 이베리아 반도 산초 3세 사후 나바라 왕국은  레온 왕국 ,  카스티야 왕국 ,  아라곤 왕국 으로 분열되었다. 남부의 초록색은 이슬람 영토로 여러 타이파국으로 분열되어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