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닌그라드는 발트해에서 유일하게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이다. 면적은 1만5천㎢으로 강원도보다 약간 작고, 인구는 94만명이다. 독일에 없는 독일의 고향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독일 북동부 변경의 중요 도시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의 북부 1/3 가량이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독일을 최초로 통일한 독일 제국의 주역이자 전신이었던 프로이센 왕국의 발원지이고, 베를린으로 수도를 이전한 뒤에도 역대 프로이센 왕의 대관식은 지금의 칼리닌그라드 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치뤄졌다. 칼리닌그라드 시는 유명 독일인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2018년 현재 인구 994,599명(2018)이며, 러시아인이 86.4%로 대부분이다. 그 밖에 우크라이나인(3.7%), 벨라루스인(3.6%), 리투아니아인(1.1%), 아르메니아인(1.0%), 독일인(0.8%) 등이 거주하고 있다.
본래 칼리닌그라드 주민 다수는 독일인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결과 나치 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피난, 강제추방, 보복성 학살 등 소련의 제노사이드로 독일인은 대부분 사라지고 그 자리를 러시아인 이주민이 채워 러시아인 도시로 교체되었다.
추방을 피해 숨은 독일인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도 독일인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구대비 비중은 0.8%에 불과하다. 비중은 미미하지만 독일인 마을이 남아있고 지금도 독일 성씨와 독일어를 보전하고 있다. 그 마을 거주민 대다수가 독일 융커 귀족의 후손인데 그들은 과거 동프로이센 주민으로서 대를 이어 끝까지 이곳에 사는 것을 신념으로 여긴다고 한다. 전후 재산을 잃고 독일 성씨와 독일어라는 정체성과 언어만 남은 셈이다.
현재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가 칼리닌그라드 주 발티스크에 주둔하고 있다. 이 곳을 상실하면 러시아 정부로서는 발트 해에 해군력을 투사할 방법이 거의 사라지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이다. 본래는 발트계의 프로이센인의 땅이었다. 1256년 보헤미아의 왕 오타카르 2세의 권고로 튜튼 기사단에 의하여 쾨니히스베르크 성(城)이 건설된 것이 이 도시의 시초였다. 한자 동맹에 속한 도시가 되었고, 1457년 튜튼 기사단의 본부가 세워졌으며, 1525년 프로이센 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이 도시가 속한 동프로이센은 폴란드 회랑(回廊)에 의해 독일 본토로부터 육로가 끊기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이 도시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역사적 건축 문화재 또한 많이 파괴되었다. 또한 1945년의 쾨니히스베르크 전투에 의해 도시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봄, 1940년 37만 명이던 도시의 인구는 5만 명으로 줄어 있었다. 이들 독일인 주민들은 1948년까지 거의다 추방되었다.
2차 대전 직후 소련은 벨라루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연방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칼리닌그라드의 연결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91년 발트3국이 독립하고 벨라루스도 소련에서 이탈했지만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영토로 남았다. 그런데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와 육로로 연결되는 지점이 없는 월경지(越境地)가 되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와 비자 없이 지나갈수 있도록 협정을 맺었다. 따라서 러시아 본토에서 칼리닌그라드로 육로로 이동하는데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와 라트비아가 2004년에 EU에 가입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셍겐조약은 회원국 국민들에게는 역내에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지만 역외국가 국민에 대해 비자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국민과 칼리닌그라드 주민들은 그 중간지대를 경유할 때 비자를 받아야 하게 되었다.
원래 독일령이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독일이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던 적이 있지만, 동독과 서독의 통일을 앞두고 결국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독일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소중했던 도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개전국으로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과감히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