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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충돌 '만지케르트 전투'

frog.ko 2021. 2. 24. 07:42

만지케르트 전투는 같은 장소에서 17년의 시차를 두고 두 번의 전투가 있었으며, 2차 전투가 유명하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1071826일에 비잔티움 제국과 알프 아르슬란이 지휘하는 셀주크 제국 군대간의 전투로서, 테마 아르메니아콘의 만지케르트 근교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결정적인 패배 중의 하나로 결말이 났으며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는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아나톨리아에서 투르크 부족에 대한 제국의 저항을 완벽하게 무력화시켰다.

 

10세기 후반, 트란속사니아의 유목민족이었던 셀주크투르크족은 역사무대에 데뷔한 이후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1045년 경 페르시아 일대로 진출한 그들은 10년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압바스 왕조 대신 이곳에 보호령을 설치했다. 하지만 그들의 최종목표는 바그다드도, 비잔티움도 아닌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였다. 이슬람 이단인 시아파를 숭배하는 파티마 왕조는 셀주크 투르크 제국에 있어 최대의 라이벌이었을 뿐만 아니라-셀주크 투르크 제국은 정통 순니파 이슬람교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파티마 왕조 또한 바그다드를 노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정복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셀주크의 술탄인 알프 아르슬란이 아르메니아와 아나톨리아에 쳐들어 왔을 때도 사실 비잔티움 제국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전략적 요충지였던 아르메니아 지방을 확보한 후 진정한 적인 파티마 왕조와 겨룰 계획이었던 것이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은 바실리우스 2세 불가록토누스의 사후 겉으로는 지난날의 아성으로 매우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는 듯 하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마케도니아 왕조 번영의 근원이었던 테마제도가 붕괴되고, 로마누스 3세와 콘스탄티누스 9세에 의한 대토지 소유자 육성책-프로노이아 제도: 비잔티움 제국의 봉건제도-에 의해 제국은 주력군의 근원인 자영농을 상실하면서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대 이전의 용병제로 환원하게 되었으며, 안정적인 재정수입원(물론 중소 자영농)들을 상실함으로써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은 제국 역사상 최강의 적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1068년 제위에 즉위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군인으로써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실패하였지만 그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1068년과 1069, 내부의 적들-경쟁자들이었던 프셀루스와 두카스 가문-의 방해와 열악한 군사환경의 가운데서도 로마누스 4세는 동방원정을 감행해 제국의 입지를 크게 강화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1071년 대규모의 원정군을 조직한 로마누스 4세는 요세푸스 타르카니오테스와 니케포루스 브리엔니우스와 함께 양면으로 나누어 셀주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두카스 가문과 결탁한 타르카니오테스가 중요한 시점에서 황제를 배반함으로써 로마누스 4세는 군대의 절반이 사라진 상태에서 셀주크와 운명을 건 한판승부를 벌이게 된 것이다.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와 니케포루스 브리엔니우스는 만지케르트를 손에 넣었으나 곧바로 셀주크 군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얼마 후 술탄인 알프 아르슬란이 합리적인 수준의 강화조약을 제의해 왔으나, 제국이 투르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로마누스 4세는 이를 거절하고 알프 아르슬란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알프 아르슬란의 유인책에 걸려들어 순식간에 비잔티움 군의 대오가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후위부대의 안드로니쿠스 두카스가 병력을 이끌고 열심히 도망치는 바람에 결국 로마누스 4세는 포로로 사로잡혔고 비잔티움 군은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알프 아르스란은 포로가 된 로마누스 4세를 용서하고 관대한 평화조약을 맺은 후 로마네스 4세를 돌려 보냈으나, 로마누스 4세는 새 황제인 미카일 7세와 두카스 가문의 군대에게 붙잡혀 실명당한 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국 셀주크와의 평화조약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수십만의 셀주크 대군이 아나톨리아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1080년 무렵 알프 아르슬란의 아들 말리크샤가 이 일대 8만 평방킬로미터를 점령한 후, 이 곳이 옛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는데 착안하여 자신의 제국을 '룸 술탄국'이라고 이름짓기에 이르렀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동로마제국의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동로마 영토는 아시아쪽 아나톨리아 고원을 빼앗기고 소아시아 서부해안과 유럽쪽만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구의 절반을 잃었고, 곡창지대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 전투 이후 동로마는 더 이상 제국이라 불릴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안티오키아도 빼앗겨 유럽의 기독교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도 차단되었다.

 

이 전투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도 충격을 주었다. 109511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제창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셀주크튀르크의 전성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13세기 몽골에 의해 멸망 이후 소아시아 일대에는 튀르크족 중심의 '오스만 제국'이 수립됐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도 막을 내렸다.

Byzantine Empire 1170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