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이 끝나고, 신성 로마 제국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300여 개의 영방 국가(13세기 봉건 제후들이 세운 지방 국가)와 자치 도시의 연합체로 분열되었다. 오스트리아 왕국(합스부르크 왕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브란덴부르크 대공국(독일 북동부), 바이에른 왕국(독일 남동부), 쾰른 대주교령, 작센 공국(독일 중동부) 등은 비록 통일된 왕국은 아니었지만, 독립된 주권을 가진 국가로 나름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오스트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강력한 국가로 떠오른 프로이센(브란덴부르크 대공국)으로 인해 유럽은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발트 해(덴마크 남부에서 북쪽으로 북극권까지 뻗어 있는 바다) 남동부 해안에 위치한 프로이센은 원래 프로이센 토착민들이 살던 지역으로, 중세부터 폴란드 인과 독일 인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다. 1266년 폴란드 영주 마조비아의 요청으로 독일 기사단(십자군 전쟁 시대의 3대 기사단 중 하나. 튜턴 기사단이라고 불림)이 들어와 지배하였지만, 그들이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독일 기사단의 세력이 쇠퇴하였다.
그러나 1525년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의 기사단장 알브레히트가 자신의 세력을 기사단에서 분리하여 신교로 개종하고, 폴란드 왕으로부터 그 지역을 하사 받아 프로이센 공국을 열었다.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면서 프로이센 공국의 사위였던 요한 지기스문트가 공국을 상속 받았다. 이 일로 브란덴 부르크와 프로이센 공국은 연합국이 되어 힘을 키워 나갔다. 그리고 166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요한 지기스문트의 손자)이 스웨덴과 폴란드의 전쟁을 틈타 폴란드의 지배로부터 프로이센 공국을 해방시켰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가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 연방 서부 모스크바 주에 있는 도시인 칼리닌그라드)를 수도로 삼고, 프리드리히 1세(1701~1713년까지 재위)로 즉위하면서 프로이센 왕국을 세웠다. 이때만 해도 프로이센 공국의 땅을 제외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 안에 있었다. 그러다가 프리드리히 1세가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1) 을 위해 군사를 모으던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1세(1658~1705년까지 재위)에게 병력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영역 밖인 프로이센의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전체가 프로이센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714~1740년 재위)는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절대 왕정(군주가 어떠한 법률이나 기관에도 구속받지 않는 절대적 권한을 가지는 정치 체제)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프로이센 왕국을 유럽 최강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1740년에 프로이센의 왕이 된 프리드리히 2세(1740~1786년 재위)는 부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로부터 물려받은 튼튼한 국가 재정과 유럽 최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리드리히 2세는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있던 1357년부터 소유권을 주장해 왔던 슐레지엔(폴란드 남서부에 위치한 역사적인 지방. 실레지아라고도 부름)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에 대해 문제 삼아 오스트리아로 쳐들어갔다. 그 당시 슐레지엔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통치를 받고 있던 지역으로, 광업과 섬유업이 발전하여 최고로 번창한 지방이었다. 그렇기에 프리드리히 2세가 더욱 욕심을 부린 것이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740년 오스트리아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카를 6세(1711~1740년까지 재위)의 죽음이었다. 카를 6세는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일찍 죽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이 끊기게 되자, 국사 조칙2) 을 정해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상속자로 삼았다.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왕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가 즉위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게르만의 법전인 살리카 법3) 을 내세워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문제 삼았다. 또 바이에른 선제후인 카를 알브레히트(174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가 됨)도 여자는 상속권이 없다며, 자신이 진정한 합스부르크의 상속인이라 주장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을 요구했다.
이때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내놓아 전쟁의 구실을 삼았다. 그건 바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1356년에 금인칙서가 발표된 이후 투표권을 가진 일부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해 옴) 때 카를 알브레히트 선제후 대신, 토스카나 대공 프란츠 스테판(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남편)을 지원해 줄 테니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기회를 노리던 프리드리히 2세는 1740년 12월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슐레지엔을 공격해 7주 만에 점령해 버렸다. 프로이센의 승전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국가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국사 조칙 승인 취소를 통보했다. 다음 해 4월 프로이센 군대가 몰비츠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자, 프랑스와 에스파냐, 바이에른 선제후, 작센 선제후도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했다.
그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원한 세력은 영국뿐이었다. 영국은 식민지 패권 장악에 걸림돌인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지원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제2차 백 년 전쟁4) 이라 불리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을 손에 넣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군을 몰아내기 위해 여러 차례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해 결국 1741년에 클라인 슈네렌도르프 휴전 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때부터 슐레지엔은 사실상 프로이센의 차지가 되었다.
그 뒤로도 반년 이상 두 나라 사이의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오스트리아는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742년 6월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 2세와 브레슬라우(브로츠와프의 독일어 이름. 폴란드 남서부의 주)에서 휴전 회의를 하고, 7월에 베를린 조약을 맺으면서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슐레지엔 점령을 허용하고 말았다. 1740년부터 여기까지를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이라고 한다.
오스트리아는 단지 슐레지엔만을 요구하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그 소유권을 인정함으로써, 잠시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접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여유가 생기자 오스트리아는 다시 병력을 모아, 왕위 계승권을 두고 전쟁 중이던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바이에른 군대를 보헤미아에서 몰아내고, 바이에른을 침공해 위협을 가했다. 1743년에는 오스트리아 동맹군으로 나선 영국과 하노버·헤센 군대가 바이에른의 데팅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무찔렀다. 게다가 사보이 왕국이탈리아 사르데냐 왕국까지 오스트리아 편에 합류하자, 프랑스 군은 1743년 9월에 물러나고 말았다.
1745년 1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7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막시밀리언 3세 요제프는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바이에른 영토를 되찾기 위해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리고 테레지아 여제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는 데 지원하기로 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가 세력을 키워 나가자, 위협을 느낀 프로이센은 군대를 내보내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처음엔 오스트리아의 육군 원수 오토 페르디난트 트라운에게 크게 패하여 슐레지엔에서 철수하였지만, 곧 다시 슐레지엔을 차지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45년 12월에 드레스덴 조약을 맺어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남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승인을 조건으로 슐레지엔의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받았다. 이때부터 프리드리히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1244년부터 1745년까지 일어난 이 전쟁을 ‘제2차 슐레지엔 전쟁’ 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의 전쟁은 1748년까지 계속되었다. 별다른 성과도 없이 소모전만 치르게 되자, 1748년 10월에 엑스라샤펠 조약(아헨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이 조약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영토 대부분에 대한 상속권을,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를 둘러싼 갈등은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었다.
원래 자신이 상속 받은 권한을 인정받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슐레지엔까지 빼앗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슐레지엔을 되찾으려고 했다. 군대를 개혁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국무 장관 카우니츠의 구상을 받아들여 프랑스·러시아·스웨덴·작센 등과 동맹을 맺어 유럽에서 프로이센을 고립시켰다. 역사에서는 이를 동맹의 역전(Diplomatic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때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해, 별 소득도 없이 국력만 소모했다. 그래서 프로이센을 치기 위해 30년 전쟁으로 앙숙이 되었던 오스트리아와 손까지 잡은 것이다.
그러자 프로이센도 영국의 조지 2세(하노버 선제후를 겸함)와 조약을 맺고, 1756년 작센으로 먼저 쳐들어가 수도 드레스덴을 점령해 버렸다. 또 1757년 로스바흐(작센 지방 라이프치히 근교) 전투에서는 병력이 우세한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과 맞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1759년 쿠네르스도르프에서 벌어진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너무 많은 손실을 입었다. 여기에 지지 세력이었던 영국의 피트 총리가 물러나, 영국의 지원마저 끊기게 되자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구한 것은 엉뚱하게도 러시아였다. 1762년에 오스트리아를 적극 지지하던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갑작스럽게 죽고, 표트르 3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평소 프리드리히를 존경하던 표트르 3세는 왕위에 오른 뒤,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중단했다. 그뿐 아니라 병력까지 지원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슐레지엔에서 몰아내는 데 협력하였다.
그 결과 프리드리히 대왕의 연합 군대가 다시 전세를 역전시키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 없이 전쟁을 계속하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마침내 오스트리아는 1763년 2월 15일에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맺고 전쟁을 마감하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은 슐레지엔을 노린 프리드리히 2세와 상속 받은 권한을 지키기 위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의 싸움에, 왕위 계승에 관련된 독일 영방 국가들과 해외 식민지를 두고 싸우던 영국·프랑스가 서로 동맹을 맺고 참여한 전쟁이었다.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의 완전한 주인이 되어 독일의 근대화의 주도권을 잡았을 뿐 아니라, 유럽의 새로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두 전쟁에 참여하였지만, 커다란 성과도 없이 엄청난 재정만 낭비한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 두 나라의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화의를 하기 5일 전인 1763년 2월 10일에 파리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의 모든 군사적·정치적 권리를 잃고, 해외 식민지 패권 다툼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영국은 캐나다와 인도를 비롯한 식민지와 해상권을 장악해 대제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