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트 4부 연맹 또는 두르벤 오이라트는 몽골 서부 알타이 산맥 인근에 위치했던 초로스, 도르베트, 토르구트, 호쇼트 부족의 연맹체를 말한다.오이라트는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했을 시절 서북쪽 끝자락에 살던 산림 부족들이다. 오이라트는 1207년 칭기스 칸의 몽골 제국에 복종하였다. 오이라트는 몽골에 편입되었지만 케레이트, 나이만 등의 잔존 세력을 흡수하였다.
1368년 원나라가 망하고 난 뒤 원의 고위 관리였던 몽케테무르는 스스로 오이라트의 수장을 자칭하였다. 몽케테무르가 죽고 나자 마흐무드, 타이핑, 바투볼라드 세 명의 족장이 오이라트를 다스렸다. 그들은 명나라에 공물을 보내며 신속하였고, 명나라 영락제는 1409년 그들에게 왕의 작위를 수여했다.
1388년 북원 내부의 혼란을 틈타 몽골 고원 서방의 네 부족, 즉 오이라트 부족 내 코이드부(후일의 이크밍안), 케레이트의 후예인 케레누트부(후일의 톨구트부), 나이만의 후예 초로스(후일의 준가르), 바르그투부는 이수데르를 추대한 뒤 오이라트 4부라고 부르는 부족 연합을 결성했다.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이 몽골 칸위를 차지하면서 이들은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수데르가 칸위를 차지한 지 얼마 안된 1391년에 죽자, 그의 아들 혹은 동생인 엥케가 칸으로 즉위했지만, 겹쳐진 혼란에 의해 대칸의 권위는 실추하고 고하이 태위나 우게치 카스하와 같은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지도자에게 실권은 빼앗기게 되었다.
오이라트는 엘베크 칸 때부터 북원 보르지긴 왕조에게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했다.
오이라트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몽골보다 늦지만, 하필이면 몽골의 4칸국의 경계선에 진출했었기에 몽골 제국 시대에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고, 주로 원나라의 반대편에 서서 싸웠으며, 태조 홍무제가 명나라를 세우고 북진하면서 북원, 즉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에 대항해 싸웠다. 성조 영락제의 북벌이 있었으나 도망쳐서 무사할 수 있었고, 영락제 사후 몽골 고원을 제패하였다.
1449년 오이라트의 군주 에센 타이시는 토목의 변을 일으켜 영종 정통제를 부획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자세한 점은 토목의 변 항목 참조. 이렇게 몽골과 맞서 싸우면서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쪽의 유목 민족들을 흡수했다.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를 위시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 전쟁 당시 가장 거세게 대항했던 부족들로 워낙 덩치가 큰지라 말이 오이라트지 실제로는 흡수된 부족 출신들이 원 오이라트계보다 훨신 많아졌다. 즉 이즈음에는 오이라트를 중심으로 서몽골의 유목 부족들이 뭉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오이라트의 최대 부족 순위는 준가르와 토르구트부터 나이만, 케레이트 계열이 되었다.
이렇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에센은 당시 몽골의 카안이자 매부였던 타이슨에게 누이의 아들, 즉 외조카를 후계자로 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에센의 세력을 두려워한 타이슨은 에센의 요구를 거절했다. 분노한 에센은 타이슨 카안과 싸워 그를 패사시키고, 오이라트 여자와 혼인한 자를 제외한 칭기즈 칸의 황금씨족 전부를 학살했다. 당장, 훗날 다얀 칸이 되는 보르지긴 바트뭉흐가 살아남은 이유가 오이라트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이때 칭기즈 칸 후손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록과 문서, 족보까지 소실되고 말았다. 그 다음 1453년, 에센은 직접 대칸(카안)의 지위에 올라서 연호를 첨원이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후손만이 카안이 될 수 있다는 정통성을 깬 무리수를 둔 데다 몽골 출신의 키야트 보르지긴 황족들을 학살한 것 때문에 몽골인들이 좋게 볼 리가 없는지라 카안에 오른 지 2년 만인 1455년에 그의 자리를 노리던 부하 족장인 지원 아랄에게 시해당했다. 오이라트 역시 에센 사후 혼란에 빠지고 약화되어 몽골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서쪽 자신들의 본거지로 후퇴했다.
이 후유증으로 몽골 고원은 동쪽의 몽골과 서쪽의 오이라트로 분열했다. 몽골도 이후 차하르와 할하로 분열했다. 그 할하도 할하 좌익, 할하 우익으로 나누어졌다. 현재 외몽골은 할하부 중심이고, 중화인민공화국령 내몽골은 차하르부 거주지이다. 몽골과 중국의 기록에서는 몽골에게 수시로 털린다고 나와 있으나 오이라트는 16세기 초반 알탄 칸의 시대까지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유지했다.
1600년대 초반부터 중가리아에서 오이라트는 부활하기 시작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카자흐스탄 북쪽을 거의 점령하고,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의 국가들을 수시로 털고 다녔으며, 심지어 카스피해 북쪽까지 원정했고, 1623년 몽골의 할하부를 격파하여 완전한 독립에 다시 성공했다. 그 직후 내분을 겪어 케레이트 칸국의 후예인 토르구트 부족이 서쪽으로 이주해 카스피해 북부의 노가이 칸국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삼아 지금의 칼미크가 되었다. 이웃 튀르크계 부족들이 부르던 호칭을 받아들인 것으로, 본래 준가르 일대의 오이라트인은 경멸스럽다고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남은 오이라트의 부족들 중 호쇼트부는 티베트 내전에 개입한 후 티베트 방면으로 남진해 떨어져 나갔다.
1640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성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몽골과 화의한 후 준가르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최후의 유목제국이라고 불리는 준가르 칸국을 세웠다. 예니세이 강에 살던 키르기즈족 중 일부가 현재 키르기즈스탄에 거주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준가르와 러시아의 협정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은 키르기즈족은 하카스인이 되었다.
오늘날 러시아의 칼미키야 공화국의 칼미크인, 몽골의 도르베트인,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하는 토르구트인은 오이라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