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인이란 동슬라브계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슬라브 민족을 말한다. 혈통상으로는 동슬라브족에 속하고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루신인과 매우 가깝다. 우크라이나라는 말은 근세에 생긴 어휘이며, 중세에는 루테니아인(Ruthenians)이라는 말로 더 자주 칭해졌다.
슬라브인, 그리고 동슬라브들의 기원 지역이 우크라이나 현 영토와 상당히 겹치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슬라브족과 기원전부터 이곳에 정착해서 살던 선주민족인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알란인 등 이란계-투르크계 유목민족들이랑 결합하면서 형성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고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은 러시아군의 정예 경보병이나 기병으로 복무하며 시베리아 진출과 캅카스, 중앙아시아 정복에 공헌하였다. 캅카스와 시베리아의 전략적 요충지마다 코사크들이 주둔했으며 이 때문에 카자크 중에서는 체르케스인 등 캅카스 민족들과 통혼한 혼혈들도 흔했다 하며, 이 외에도 시베리아와 연해주에는 우크라이나식 성씨를 가진 사람이 꽤 많은 편이다. 러시아내의 우크라이나인들은 특히 시베리아 지역의 경우 성만 우크라이나식이고 러시아인으로 동화된 경우가 많다.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우크라이나의 지식층들은 폴란드인이나 러시아인으로의 동화가 강요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억압했다.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대개 러시아 시골을 떠올리는 소박한 시골 문화나 코사크 같은 유목민 문화로 19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의 학계 연구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민족은 이미 러시아와 다른 민족이라고 지적돼 왔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어가 모어이다. 그러나 하지만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영향에다가 우크라이나인 입장에서 러시아어가 배우기 쉬운 편이고, 구소련권에서 취직하는데도 중요하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구사할줄 아는 경우가 많으며, 우크라이나인 대다수가 이중언어 화자이다.
그래서 민족 정체성은 우크라이나인인데 제1언어는 러시아어인 사람도 꽤 많다.
원래부터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벨라루스인은 키이우 대공국을 뿌리로 하는 같은 민족이었으나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대공국이 붕괴한 이후 서로 갈라졌다,
먼저 키이우 대공국의 중심부인 초르노젬 지대의 키이우 공국, 체르니히우 공국, 페레야슬라블 공국에 살던 주민과 지도자들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이우 대공국이 멸망하자 몽골 제국의 손이 미치지 않은 서쪽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피난을 가고 이후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은 몽골 제국을 견제하려는 교황청의 도움을 얻어 루테니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이 루테니아 왕국은 키이우 대공국 멸망 이후의 역사에서 러시아, 벨라루스와는 구분되는 우크라이나 역사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인 사이에서 러시아인과 별개의 민족 정체성이 나타낸 계기는 보흐단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러시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우크라이나 중부, 동부 일대를 차지하고 난 이후이다. 근세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은 같은 정교회를 믿었고,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코사크들은 루스 차르국을 구원자, 해방자로 여겼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바램대로 러시아의 지원으로 폴란드군이 격퇴되고 흐멜니츠키 봉기가 성공하면서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대제는 영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한 이후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제한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에게 과도한 요역을 부과하였고, 이렇게 요역에 파견된 코사크 상당수가 현장에서 과로와 식량 부족, 러시아 관리들의 구타 등 학대로 죽어나갔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당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던 코사크들 상당수가 건설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러시아 제국에서는 코사크들의 자치 공동체가 러시아 제국의 농노제 존치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이를 농노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코사크들의 반감을 샀다. 이러한 반감은 근대 내셔널리즘과 결합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이 스스로를 러시아인과 구별하는 다른 별개의 정체성으로 발전하였다. 비교하자면 이러한 역사적 관계가 없었던 벨라루스인들의 경우 자신들이 우크라이나인들만큼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러시아인과 구분하려 들지는 않는 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가장 큰 오판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를 엄청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러시아인과 같은 슬라브족이고, 그리스 정교를 믿고 키릴 문자를 공유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16세기 이후 러시아와 다른 역사과정을 걸었고, 그 뿌리에는 코사크(Cossacks)라는 집단이 존재한다. 러시아어로는 카자크로 발음되며, 카자흐스탄의 민족인 카자흐와 구분된다.
코사크는 중세 유럽의 기사, 근대이전 일본의 사무라이와 비견되는 동유럽 초원의 무사조직이었다. 15세기말 땅을 빼앗긴 동유럽 농민들이 흑해로 빠져나가는 드네프르강과 돈강 하류에 몰려들어 무장세력을 형성했다. 그들 중에는 슬라브족도 있었고 타타르족도 있었다. 그들은 초원의 지배자였던 폴란드-리투니아 연합왕국 또는 모스크바 공국에 소속되지 않고 차치적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우크라이나의 뿌리는 드네프르강의 호르티치야(Khortytsia) 섬에 요새를 건설한 자포리지야 코사크(Zaporozhian Cossacks)다. 이 섬은 길이 12.5km, 폭 2.5km로 여의도의 8배나 되는 하중도(河中島)다. 17세기초 그들은 이 곳을 은거지로 삼아 지배자였던 폴란드에 저항했다.
드네프르강 유역에서 출발한 코사크의 일부는 폴란드에 밀려 돈강 유역으로 이동했고, 이들이 돈 코사크를 형성했다.
코사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코카서스 등지로 흩어졌다. 그들은 러시아제국의 팽창기에 차르에게 충성하기도 했다. 코사크는 차르를 위해 모피 사냥에 나섰고, 시베리아에 이어 알래스카까지 진출했다.
시베리아를 개척한 전설적 영웅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Yermak Timofeyevich)는 돈 코사크의 헤트만이었다. 그는 1581년 코사크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해 이르티시 강변에서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 차르의 명을 받은 코사크 부대는 1639년 태평양에 다다랐고, 1648년 세묜 데즈네프(Semyon Dezhnev)가 이끄는 코사크 집단이 5척의 배를 타고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예르마크가 죽은지 60년만에 러시아는 코사크를 앞세워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진출한 것이다. 코사크는 1689년 아무르강에서 청나라와 충돌해 국경을 정하는 조약(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었다.
제정이 러시아 혁명으로 망한 뒤,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가 최초로 볼셰비키에 대해 전쟁을 전포함으로써 내전이 시작되었다. 1918년이 되면 카자크들은 완전히 독립적인 상태가 되어 우크라이나국, 돈 공화국, 쿠반 인민공화국 등 자기들의 국민국가를 세웠다. 카자크 병력과 카자크 국가들은 반볼셰비키 백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내전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나면서 과거 카자크들이 살던 지역에서는 카자크 말살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들은 평화 시에는 대단히 순박한 사람들이다. 집단에 복종하고 생업에 충실하며 산다. 하지만 외부의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은 저항했다. 폴란드나 러시아, 타타르의 침공을 받거나 핍박을 받을 때 그들은 집단적으로 저항했다. 러시아와 폴란드 지배자들의 눈에 코사크는 늘 의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배자에게 비친 배신은 피지배자에겐 자구책이었을 뿐이다.
코사크는 족장을 선출했다. 족장 헤트만(hetman)이 패전하거나 조직에 위해를 가할 경우 쫓겨났다.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더라도 집단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그들은 헤트만을 중심으로 단결했고, 헤트만이 반역하면 쫓아냈다.
2014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EU가입에 서명을 포기했을 때 우크라이나인들은 유로마이단 혁명을 일으켜 국가수반을 쫓아냈고, 러시아가 침공할 대 집단적으로 일어났다. 이런 우크라이나인의 기질은 코사크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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