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말까지 영국의 위상은 별볼일 없었다.약소국은 아니지만 스페인이나 오스만에 비할수도 없는 2등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스페인이나 오스만은 차지하더라도 100년 전쟁을 치뤘던 프랑스에 비해도 잉글랜드는 초라했다. 이 당시에 잉글랜드의 인구는 300만 내외였으나 프랑스의 인구는 1,500만에 달하였다.한때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의 절반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16세기에는 프랑스의 일부 해안을 제외하고 변변한 해외영토가 없었다. 아울러 영토도 브리튼섬 전체가 아니라 잉글랜드와 웨일즈만 보유하고 스코틀랜드는 독립된 왕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국력차이는 양국의 정부예산만 보아도 차이가 나는데 엘지자베스1세(1533~1603)여왕 재위말 잉글랜드 왕실의 재정 수입은 88,700 pound,의회의 연 수입은 64,500pound로 이를 합치면 15만 3,200 pound 였다.
이에 비해 스페인의 연 재정 수입은 1598년에 약 1,290만 듀카트에 달했다.환산 방법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스페인의 정부 수입이 잉글랜드의 6~8배에 달하는 걸로 추정된다.
이 6배~8배의 수입의 차인는 이베리아반도에 한정된 것이며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황금을 더하면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국력 차이는 한마디로 상대가 안되었다.마냑 스페인과 잉글랜드가 전쟁이 일어나면 불리한 것은 잉글랜드라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처음부터 양국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이렇게 양국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세가지 정도를 들 수있다.
▣첫째:당시 원양 항로가 발견되면서 크게 증가한 해상무역의 갈등이다.스페인은 무역을 독점하는 동시에 무역을 활용헤 다른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둘째:얀 후스,마르틴 루터,장 칼뱅으로부터 비롯된 종교개혁과 이로 인한 구교-신교간의 종교적 갈등이다.
▣셋째:스페인이 사활을 걸고 진압하려했던 네덜란드인들의 반란을 잉글랜드가 지원했기 때문이
다.
엘지자베스 치하에서 성공회 노선을 확실히 한 잉글랜드는 독실한 카톨릭 신도인 펠리페 2세의 "종교적 제국주의"가 기본적인 방향이 된 스페인과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의 아들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이었던 펠리페는 유럽 전역에 많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영토를 지키려던 정책은 다른 나라에겐 커다란 위협이었다.
반면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가 제위에 오르면서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는 신흥국 이었다.
따라서 해양무역으로 진출하고자 했단 잉글랜드는 당시 아메리카와 포르투갈까지 장악한 스페인의 독점은 단순한 걸림돌이 아니었다.경우에 따라서 국가경제를 위협받는 요인이었다.
당시 스페인,프랑스와 달리 조세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잉글랜드는 왕실예산으로 거대한 해군을 유지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 여왕 초기에 무장 함선을 소유한 자에게 해상 나포 면허를 주어 국가 수입을 충당해 해상 전력을 유지하기도 했다.
초기 양국의 무력 충돌은 스페인령인 네덜란드의 반란이었다. 펠리페2세의 강압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반란은 북부 네덜란드는 독립하고 남부는 스페인의 통치를 받아 들인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북부 네덜란드는 영국의 사력선들과 함께 스페인의 함대를 공격하자, 펠리페2세는 북부 유럽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되자 무역의 봉쇄와 유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양국이 틀어진 것은 펠리페가 1585년 발트해의 한자동맹과 조약을 맺어 잉글랜드 외 네덜란드 무역망을 금수조치시켰다.당시 한자 동맹은 세력이 약화되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북부 네덜란드와 넌서치 조약을 맺어 군비을 지원함과 동시에 영국군을 네덜란드에 주둔시킨다. 넌서치 조약으로 스페인과 잉글랜드는 사실상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엘리자베스는 해적인 드레이크를 이용하여 카디스 전투에서 스페인의 함대를 공격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였지만 아직도 스페인은 만만치 않은 상대여서 엘리자베스 1세는 전면전을 두려워했다. 결국 1588년 5월 25일 펠리페 2세는 132척의 함선,선원8,766명,병사 21,556,그리고 노꾼2,088명으로 구성된 무적함대를 발진 시켰다. 그러나 무적 함대의 문제점은 여러곳에서 배를 끌어 모은 탓에 성격과 질에서 제각각 이었다.
또한 장기간의 이동과 픙랑으로 전투력이 저하된 상태였으며 유능한 해군함대 지휘관인 산타크루즈 후작이 전쟁전에 사망하여 해전에 경험이 없는 메디나-시도니아 공작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함대는 34척의 군선과 사략선및 무장상선 164척을 포함한 194척 이었다. 북상하던 무적함대가 칼레에서 1차 전투후 그레이브라인이라 불리우는 전투에서 조우하였지만 양국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북해로 밀려나던 무적 함대는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 때문에 북해의 거친바다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1598년 9월 11일에 귀환했을때 함대는 65척으로 줄어 들었다.즉 무적함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67척의 군선과 병사를 상실한 것이다.펠리페는 포기하지 않고 1596과1597년 대함대를 보내지만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뒤를 이어 즉위한 펠리페3세도 아일랜드의 반란을 도와 교두보를 마련하려 하지만 이마저도 무위로 돌아 간다.
결국 지나친 국력 소모로 인하여 스페인은 바다와 땅에서 예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스페인이 빠진 바다를 접수한 것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였다.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는 동맹이었으나 곧 적으로 변하여 바다를 놓고 한 판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 경쟁에서 잉글랜드가 승리하게 되어 대서영및 바다에서 주도권을 쥐게되어 해외에 수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게 된다.이후 프랑스등 경쟁자를 물리치고 조세개혁및 동인도 회사등 무역로를 장악하고 18세기에 스코틀랜드까지 합병하여 대브리튼이 되고 19세기에 해가 지지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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