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1년 만지케르트전투에서 동로마제국이 투르크군에 참패한 뒤 이십 년이 훨씬 지난 1095년에 이르러서야 유럽은 겨우 뜻을 모으게 되었다.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고 주장하면서 성전(聖戰)을 선포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제1차 십자군원정(1096~1099년)의 최대 성과는 이교도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다시 찾은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찬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포로로 잡은 수만 명의 이슬람 교도와 유대인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참하게 학살했다(1099년).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국민이 잊지 못하는 악몽이다.
유럽인은 그런 일에 신경쓰지 않았다. 오로지 오랜만에 되찾은 예루살렘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종교적 열정으로 성지순례에 나섰다가 이역만리에서 목숨과 재산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템플기사단이었다.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신전의 가난한 기사들(Order of the Poor Fellow-Soldiers of Christ and of the Temple of Solomon)’이었다.
붉은 십자가를 가슴에 달고 성지순례자 보호를 내세웠을 때 유럽 각지에서는 그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땅을 헌납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템플기사단 단원들은 전사인 동시에 부자였다. 하지만 크리스찬들의 예루살렘 점령은 백 년을 넘기지 못했다. 1187년 살라딘(Saladin)이 침공해왔을 때 다시 이슬람에 빼앗기고 성지순례자들의 발길도 끊어졌다. 기사들도 예루살렘 템플 산 본부에서 철수했다.
유럽으로 돌아온 뒤 그들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았다. 바로 금융업이었다. 템플기사단은 유럽 내륙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고 각종 경비를 관리하면서 수많은 종류의 화폐와 지급결제에 관한 노하우를 익혔다. 그 노하우를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왔을 때 근엄한 기사들은 어느덧 유대인 대금업자와 똑같아져 있었다.
본업을 벗어난 그들의 ‘부업’은 문제가 있었다. 이름과 달리 전혀 가난하지 않다는 점은 순박한 일반인들이 보기에 불편한 진실이었다. 군주가 보기에는 방대한 조직과 세속적 힘을 갖춘 존재가 자신의 통제 밖에 있다는 것이 거북했다. 그러던 중 템플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던 프랑스의 필리프 4세(Philippe IV)가 템플기사단을 이단이라고 선언했다(1307년).
그리고 비기독교적이며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하고 단원들을 화형시켰다. 유대인이 아닌 크리스찬의 금융업이 철퇴를 맞은 첫 사건이었다.
왕의 정치적 계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템플기사단은 이후 전설이 되었다. 오늘날 서양 영화에서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길고 흰 가운을 걸친 중세 기사들이 이따금씩 보이는데, 이들이 템플기사단이다. 금융업자가 아닌, 늠름하고 정의로운 영웅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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