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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킴 왕국, kingdom of Sikkim

frog.ko 2020. 11. 16. 02:27

시킴(sikkim) 왕국은 인도의 동북부 네팔(西)과 부탄(東), 티베트(北)에 둘러싸여 있는 인도 번왕국이었다. 1642년에 설립되었으며 1861년부터 1947년까지는 영국의 보호국으로 남아 있었다. 1975년 인도에 합병되면서 소멸되었다.

 

원주민은 티베트미얀마계인 시킴 제민족(레프차인, 부티아인 등)이지만, 영국 보호령 시절 네팔인이 엄청나게 유입되는 바람에 네팔계 민족들이 60%를 차지해 버렸고, 인도에 병합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언어 측면에서는 62%의 주민이 네팔어를 사용해 사실상 공통어이며, 시킴어, 레프차어는 특정 지역에서 사용된다. 종교는 힌두교가 약 58%, 불교 약 28%, 크리스트교 약 10%이다.

 

1975년 시킴은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97%가 인도와의 합병을 찬성했다. 그 이래로 시킴은 주로 시킴민주전선[Sikkim Memocratic Front(SDF)]의 통치를 받았다. SDF는 비닐봉토 사용을 금지하고 개울을 오염시키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등 인도에서 가장 환경 의식이 강한 정부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아작도 시킴을 인도의 영토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시킴은 인도와 중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지역이다.

 

1642년에 부티아인의 남걀 왕조가 시킴 왕국을 세웠는데, 티베트 불교를 믿는 독립된 왕국이었다. 왕의 호칭은 초걀(Chogyal)이었으며 티베트 불교의 달마를 겸했다. 작고 힘없는 나라라 1700년 이후 네팔,부탄에게 연이어 침략을 받고 수도까지 털리는 동네북 신세였다. 1791년 청나라가 네팔의 침입으로부터 시킴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후 시킴은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기, 시킴은 영국과 연합하여 네팔과 싸우는데 네팔은 구르카를 주축으로 시킴을 공격하여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한다. 이에 영국이 1814년 네팔로 반격하여 1817년 시킴을 반환받는다. 하지만 이후 영국과의 동맹은 약화되어 1849년 영국인의 억류를 계기로 영국군은 시킴을 정벌하고 1853년 이후 사실상의 영국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만다.

 

1950년 인도의 보호령이 되었으나, 1974년 총선거에서 친인도계 "시킴 국민의회"가 승리, 신헌법의 제정을 서둘렀으나 국왕이 반대하면서 1975년 3월 5일 국민의회는 인도에 합병을 요구했고, 9일 인도군이 진주해 왕궁 수비대의 무장을 해제, 왕을 감금했다.

 

다음날 국민의회는 인도 수상 인디라 간디의 지지로 일방적으로 왕정 폐지, 인도에 합병 결의를 했으며 14일 국민투표에서 97.6%의 지지를 얻었다. 결국 1975년 5월 16일 인도에 의해서 22번째 주로 합병되었고, 그때까지 존재하던 왕정은 폐지되었다.

 

사실 소국이나 찍어누르는 강제합병으로 볼 수도 있었던 것이었으나 이미 네팔계들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해버렸고, 언제 중국과 인도에 사이에 끼어 불안한 상황에서 친인도파들이 중국보다는 차라리 인도가 낫다는 명분 하에 인도군을 끌어들여 합병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반발도 있었지만 결국은 소수 의견에 묻혔다.

 

시킴 북쪽에 인접한 중국은 한동안 인도의 시킴 병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지도 중에서는 시킴이 독립국으로 표시된 지도도 있다. 더불어 국경이 폐쇄되기도 하였으나, 2003년 시킴을 중국이 인도의 영토로 사실상 인정한 이후 2006년 국경이 재개방되었다. 이는 중-인간 국경에서 유일하게 개방된 통로이다.

 

현재 시킴은 인도의 한 주로 정착했으나, 입국을 위해서는 따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는 특이한 지역이다.

두 여인 등쌀에 패망한 시킴 왕국

미국 사교계 출신의 아리따운 아가씨와 영국 출신의 열정적인 아가씨가 「히말라야」산중의 소왕국 「시킴」의 두 귀족과 결혼했다. 

이 두 여인 간의 잇따른 권력투쟁은 「시킴」을 정치 음모의 와중으로 몰아넣어 결국 인도로 하여금 이 소국을 집어삼키도록 하는 문을 열어주게 되었다. 

영국에서 이혼하고 인도에 건너온 「에밀·마우드」라는 여인이 「시킴」이의 백부 「가지·렌두·도르지」와 결혼했으나 그녀의 남편이 전통의 힘에 눌려 왕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수도「강토크」을 떠나 인도 북부의 「칼림퐁」에 별장을 짓고 이곳을 권력정치의 교습을 위한 그녀의 본부로 삼았다. 

그러나 1963년 미국 「사라·로렌스」대학의 아리따운 한 여대생이 「시킴」의 「팔덴·톤둡·남걀」왕자를 매혹시켜 왕자는 그의 부왕이 사망하자 이 미국 아가씨 「호프」양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왕비가 된 「호프」양은 미남의 「남걀」왕에게 「시킴」은 독립해서 「유엔」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킴」의 전략상 위치 때문에 「시킴」을 계속 그들의 강력한 통제 밑에 두기를 원하고 있는 인도는 이를 저지하기로 결심, 「남걀」 왕의 절대 권력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시킴」의 유력한 정치지도자들과 손을 잡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 바로 「마우드」 여인의 남편 「카지·렌두·도르지」였다.

 「마우드」 여인이 주도한 시위대는 「강톡」에 몰려들었고 공포에 떤 왕은 법과 질서의 회복을 위해 인도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이따른 몇 달 동안 왕은 그의 권력을 인도의 관리들에게 넘겨주는 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남걀왕은 시킴국왕으로 12년간 재위했으며 1982년후 미국에 망명중 7년 후 한을 품고 미국 뉴욕에서 병사하였다.

[출처: 중앙일보] 두 여인 등쌀에 패망한 시킴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