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패자의 부활 '터키의 독립전쟁'

frog.ko 2020. 11. 23. 18:33

터키 독립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여 연합국이 제국을 분리하려 하는데 반발한 터키 민족주의자들이 일으킨 정치 및 군사적 저항이다. 1차 세계 대전의 패망 속에서 오스만 제국을 끝내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터키를 구해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을 만든 전쟁이다.

 

19181030, 오스만 제국과 협상국이 무드로스 정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이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이 협정을 통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권리와 더불어 오스만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소요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결국 같은 해 1112, 프랑스군이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서부 아나톨리아일대의 도시들을, 그리스군이 동로마 제국 회복인 대그리스주의(통칭 대이상)을 명분으로 유럽에서는 트라키아 동부에서 이스탄불까지, 바다를 건너와 소아시아에서는 이즈미르와 트라브존 일대의 룸(rum)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안에 따라 계획을 차곡차곡 실행해 왔으며, 이는 19208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진다. 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터키인들에게 남는 건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협상국들이 나눠 먹는, 사실상 터키 해체나 다름없는 조약이었다.

 

한편 이러한 꼴들을 보다 못한 터키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으로든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군이 이즈미르에 상륙한 1919515,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은 점령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알을 발사했고, 그리스군의 즉각적인 대응에 따라 즉시 사살되면서 독립전쟁의 첫번째 전사자가 되었다. 이 총알은 곧 이즈미르에 남아있던 전직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자극했으며 그 날 하루 시내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져 3,500여명의 전사자를 내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즉각 터키 전국에 알려졌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된 이스탄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가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상태파악 등을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의 소극적인 저항과 함께 연합군에 의해 압수된 제국의 병기나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서 독립운동단체에 넘기는 등의 활동을 했다.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군인들의 저항 끝에 1919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나는데,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의 군대와 또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Ali Fuat Cebesoy)의 군대가 그것이었다. 이스탄불에서 사실상 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술탄 메흐메트 6세는 아직 오스만에 충성하는 장군들을 구슬리고자 오스만의 행정력이 남아있는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의 태수로 임명하게 된다.

 

아나톨리아에서 터키의 민족 운동은 새로운 터키 대국민의회의 창설로 절정에 이르렀는데, 대국민의회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선출한다.

 

사면초가였던 대국민의회가 그리스군을 막아서는 동안 후방에서는 터키인들의 집요한 항쟁이 이어졌다. 그리스군의 짐을 운반하는 짐꾼들이 방심한 틈을 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다음에 독립군에 합류한다거나, 길 안내를 자처한 터키인들이 장교들이 방심한 사이에 수류탄을 터트려 장교와 함께 동귀어진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여자들은 공장에서 총알을 만들고, 아이들은 어머니를 도와 물자를 전선으로 날랐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터키인들은 끊임없이 항쟁했으며, 결국 이는 독립전쟁을 터키의 승리로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218월에 그리스군은 드디어 앙카라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앙카라에서 불과 20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아피욘-카라히사르 전선(Afyon-Karahisar)이 붕괴되어 그리스군은 사카리야강까지 이르렀으며, 이곳에서 823일부터 913일까지 장장 21일에 걸친 전투가 벌어진다. 대국민의회는 필사적으로 이곳을 지켜내야만 했지만 그리스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장장 21일동안 전투는 밤낮없이 벌어졌다. 당시에 해당 방면으로 돌릴 수 있는 군대란 군대는 다 투입했기 때문에 앙카라 수비군도 전원이 이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아타튀르크는 말을 타고 최전선으로 나와서 장병들을 독려했고, 다른 장군들과 함께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와같은 노력 끝에 비록 전사자수는 터키군이 더 많았지만 어쨌든 그리스군의 진군을 최종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결국 1922년에 이르면 도리어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그리스도 평화에 동의하게 되었고, 결국 1923724일 로잔조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된다.

 

결국 로잔 조약에 따라 동트라키아, 스미르나는 터키에게 정식으로 되돌아왔으나 에게 해의 섬은 터키 영토의 코앞에 있는 것까지 죄다 그리스에게 넘어갔다.

 

현대 터키 영토의 코앞에 있는 섬들까지 그리스 영토가 된 것은 터키의 해군이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터키와 그리스의 현재의 국경선이 설정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이며, 오스만 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배, 항복한 뒤 이스탄불에 진주한 연합군의 우두머리인 영국인 고등판무관이 그리스-터키 전쟁을 지켜보다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져서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생 터키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땅 아니면 에게 해의 섬들 중 하나를 가지라고 제안하자 터키 정부가 이스탄불 주변 땅을 선택해서 에게 해가 그리스 영해가 된 것이다.

 

그리스는 제1차 세계대전 협상국으로 참가해 득본 셈. 이 때문인지 이 지역의 영해 범위를 놓고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영토 분쟁 갈등이 있다고 한다. 또한 터키는 튀르크계가 일부 분포하고 있는 키프로스 역시 포기했다. 이는 이후 키프로스 분단을 초래하였다.

 

터키 민족 운동의 성공으로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체제가 무너지고, 아타튀르크의 개혁으로 터키에 근대적이고 세속화된 국민 국가가 들어섰다

 

다만 이 전쟁으로 터키 거주 쿠르드족은 날벼락을 맞았다. 세브르 조약을 맺을 당시 영국은 쿠르드족을 회유하기 위해 영국 점령지 중 일부를 쿠르드족에게 넘겨서 독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터키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세브르 조약을 무효화하고 해당 점령지를 터키 영토로 돌려주면서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도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때의 경험 때문인지 터키 정부는 이후 쿠르드족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로잔 조약
터키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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