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鹿屯島)는 조선 시대에 두만강 하구에 있던 섬으로, 17세기 말 ~ 19세기 초 사이에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강 동쪽의 연해주에 붙어 육지가 되었다.
조산(造山)동에서 남쪽으로 약 4 km 떨어져 있었던 녹둔도는 둘레가 8 km 남짓 되고 면적은 약 3~4 km²(여의도 면적의 1.1~1.3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섬에서 조선인들은 벼, 조, 옥수수, 보리 등을 재배하였고, 섬 주변에서는 연어, 붕어, 황어, 숭어 등이 주로 잡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884년 경에는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주민들 중 다른 나라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녹둔도는 1430년대에 세종대왕이 6진을 개척한 이후 토성과 목책을 쌓았고, 이전에 '사차마도'라 하던 것을 세조 때 '녹둔도(鹿屯島)'라 부르게 되었다. 1583년(선조 16) 경흥부 현지 군사들의 군량(軍糧)이 부족하자 녹둔도에 군사용 둔전(屯田)을 조성하였고, 농민들은 배를 타고 이 섬에 들어와 농사를 지었는데, 병사 약간을 두어 방비하도록 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이순신이 조산보 만호(造山堡 萬戶)를 겸해 녹도 둔전사(鹿島屯田事)로서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였다.
그후 1860년까지 조선의 영토로서 영유권을 유지하였다. 1860년 10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획득한 러시아 제국이 연해주에 붙은 녹둔도 지역까지 점령하였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조선 정부는 러시아 제국이 이 땅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뒤 1880년대에 수차례 청나라에 항의하였다. 또 러시아 제국과 수교한 1884년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했고, 1885년에는 청나라와 러시아에 3국의 공동 감계안(勘界案)을 제의했으나 무시당했다. 1890년에는 한성(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를 불러 녹둔도의 반환을 재차 요구하였으나 러시아 측은 아무런 회보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