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는 ‘남미의 유럽’으로 불리는 나라다. 동일한 유럽의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는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아르헨티나는 원주민의 비율이 현저히 낮고 유럽계 백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여 문화도 유럽풍의 모습을 하고 있다.
면적은 278만 400㎢, 인구는 4343만 1886명(2015년 현재), 수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이다. 인구의 97%가 유럽계 백인으로, 이탈리아계 35.5%, 스페인계 28.5% 등이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가톨릭교 92%, 개신교 2%, 유태교 2% 등이다.
대부분의 아르헨티나인들은 유럽에서 온 식민시대 정착민과 19~20세기 이주민들의 후손이며, 아르헨티나 인구의 85%는 스스로를 유럽인 후손으로 생각한다. 이들 유럽 이민자 대다수는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출신이다. 인구의 8%는 메스티소이다. 또 4%는 아랍인이나 동아시아인 후손이다. 최근 국가 인구조사에 따르면 600,000여명 (1.6%)만이 원주민이다.
1516년 이 땅에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들어왔다. 스페인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설치했다.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00년밖에 되지 않지만 독립 이전에는 약 300년간 스페인 왕의 영토였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더불어 남아메리카를 나누어가졌다. 포르투갈은 오늘날의 브라질 지역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스페인의 차지였다.
당시 스페인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오늘날의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가 들어서 있는 라 플라타La Plata 강 연안이었다. 스페인인들은 이곳에 정착촌을 세우려고 하였지만 원주민들의 반발로 쉽지 않았는데 금이나 은 등 자원이 많아 굳이 정복을 강행할 대상 지역도 아니었으므로 아르헨티나는 16세기 내내 스페인 식민지 변경 정도의 취급을 받았고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토지는 광대하고 비옥하였지만, 이곳에 정착해서 살려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인구는 오랫동안 매우 희박하였다.
1516년 이 땅에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들어왔다. 스페인은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설치했다. (이 영향으로 스페인어가 아르헨티나의 공용어로 쓰이고 있고 로마 가톨릭이 주요 종교이다.) 이 지역은 주로 스페인 이민자들과 크리오요라는 그들의 후손과 토착민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예들의 나라였다. 식민 시대 정착민 중 1/3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다른 도시에 모여 살았으며, 나머지는 가우초라 하여 팜파스에서 살았다. 토착민들은 아르헨티나에서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 영국이 1806~1807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두 번 침공했으나 크리요오들은 그들을 물리쳤다.
1810년 5월 25일 페르디난도 7세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쫓겨났단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민들은 1차 의회(First Government Junta, 5월 혁명)을 조직했다. 현재의 아르헨티나를 이루게 되는 두 나라가 생겼는데, 남아메리카 합주국(1810년)과 자유 연맹(1815년)이었다. 다른 주들은 자치론자와 중앙집권론자들의 견해 차로 통합 국가에 귀속되는데 시간이 걸렸다. 파라과이는 1811년 독립을 선언하며 분리했다.
호세 데 산 마르틴이 1814년에서 1817년 사이에 군사 작전을 지휘하면서 점차 독립은 현실이 되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산 마르틴을 국가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산 마르틴과 그의 군대는 1817년 안데스를 넘어 칠레와 페루의 왕당파를 무찔러 독립을 공고하게 다졌다. 1816년 7월 9일 투쿠만 의회가 소집되어 스페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1820년 자유 연맹(Liga Federal)은 남아메리카 통합주 군대와 브라질에서 온 포르투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으며, 이 주는 남아메리카 통합주로 귀속되었다. 1825년 볼리비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1826년에 아르헨티나는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시도하는 시스플라티나 주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결과 당시 브라질의 속주였던 시스플라티나 주의 독립을 막으려는 브라질과 무력으로 충돌하여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었다. 1828년에는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정전을 맺고 그 결과 시스플라티나 주가 우루과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아르헨티나는 넓은 토지와 초원이 있었으나 농사를 짓기에는 강수량이 모자라 많은 생산량을 보장하지 못했고, 때문에 목축업이 가장 크게 발달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에는 냉동기술이 없어 소와 양을 수출하려면 살아 있는 채로 실어야 했기에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냉장 기술이 개발되어 소고기 등을 도축해도 적도를 통과할 수 있게 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랜 내전이 끝나게 되면서, 그동안 미루어 두어 통제하지 못하고 있던 원주민 영토를 향한 정복 및 식민에 착수한다. 180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대규모 정복사업은 아르헨티나의 영토를 2배 이상 뻥튀기 해놓았으며,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농업과 목축업에 쓸만한 땅들이었기에 아르헨티나의 1차산업은 크게 부흥하였다.[6] 이에 지주들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져 1880년 이후부터는 초기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해외 자본, 특히나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이 유입되어 최초로 근대적 공장이 세워지는 등 아르헨티나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900년 이후부터는 그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와 사회가 크게 발전하여, 본격적으로 '남미의 프랑스'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은의 여왕', '남미의 파리' 등 화려한 명칭을 갖게 되었다. 철도와 기간사업이 건설되었고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지하철을 건설하였다. 급진주의당이 정권을 잡고 운영한 10여 년 동안은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크게 관심이 대두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였고 사회안전망에 대한 기초적 작업이 이루어졌다. 목축업과 농업은 물론 타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해 1910년 무렵부터 1970년대까지는 세계 15대 경제 대국으로 늘 빠지지 않았고, 1910년대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높은 세계 8위권으로 벨기에와 비슷했다. 이때의 아르헨티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었으며,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구입하고 독립 초기 주변국인 브라질과 파라과이와의 전쟁에서 승전할 정도로 중남미에서는 강대국이기도 했던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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