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츠와나(Botswana)는 영국에서 독립후 초대 대통령이 된 세레체 카마(Seretse Khama)가 보여준 세기의 러브스토리는 드라마와 같다. 사랑은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그의 사랑이야기는 이 사막의 나라를 독립으로 이끌고,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을 살만한 곳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으로 문제가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이웃의 영국령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반발하면서 국제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당시 남아프리카는 인종차별의 아파르트헤이트(the apartheid)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감히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결혼하디니….”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 북쪽 흑인부족에서 발생한 것이다.
당시 베추아날랜드는 영국의 보호령(protectorate)이었고, 식민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가 직접 개입할 근거는 없었다. 대신에 본국인 영국에 카마의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부족장 지위를 박탈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당시 영국엔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 내각이 물러나고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총리의 노동당 내각이 집권하고 있었다. 노동당 정권은 보수당에 비해 인종 정책과 식민지 정책에 전향적이었지만, 애틀리 정부는 2차 대전 직후의 심각한 전쟁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남아공의 금과 다이아몬드가 필요했다. 노동당 정권은 흑백 부부의 결혼을 허용하라는 진보주의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카마의 부족장 지위에 대한 심사를 실시했다.
영국 의회의 심사 결과는 카마에게 유리했다. “둘의 결혼은 불행하지만” 카마의 부족장 지위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틀리 정부는 이 심사결과도 무시하며 카마의 부족장 지위를 박탈하고 베추날랜드에서의 추방을 명령했다. 1951년의 일이다. 카마 부부는 베추날랜드에서 추방돼 영국으로 갔다.
영국에서는 애틀리 정부의 결정에 거센 항의가 제기되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인종차별정책을 버리지 않았다는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영국정부는 마지못해 카마 부부에 대해 개인적 목적에 한해 베추날랜드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락했다. 1956년 부부는 칼라하리 사막으로 돌아왔다. 카마는 부족장의 왕관을 버리고 목장을 운영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결혼과 추방 과정을 통해 독립의 절실함을 느꼈다. 1961년 카마는 베추날랜드 민주당을 창당했다. 1965년 실시된 총선에서 그의 정당은 사회당 좌파를 누르고 압승했고, 그는 영국 보호령 아래에서 베추날랜드 총리가 되었다. 그해 헌법을 제정하고 이듬해인 1966년 카마는 나라 이름을 보츠와나로 바꿔 독립을 선포했다.
그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80년 임종시까지 보츠와나 대통령으로 일했다. 1966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카마에게 대영제국의 기사작위를 하사했다. (그의 러브스토리는 2016년 엠마 아산테 감독에 의해 『어 유나이티드 킹덤』(A Uited Kingdom)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가장 먼저 할 일은 경제건설이었다. 신생 보츠와나에는 바다도 없고 농사지을 땅도 없었다. 그야말로 앞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황무지였다. 독립당시 포장도로가 고작 12km, 1인당 평균소득 60달러로, 병원은커녕 학교조차 없었다.
그는 유엔 개발자금 등 외자를 끌어와 학교와 병원을 짓고, 관계시설을 만들고 농업기술을 개량했다. 운좋게도 1969년에 남부 국경지대에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돼 재원을 보충할수 있었다. 보츠와나는 이제 아프리카 중위권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그의 맏아들 이언 카마(Ian Khama)도 정치에 뛰어들어 국방장관, 부통령에 이어 2008년 대통령에 취임해 2018년까지 10년간 대통령을 역임했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
'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타의 종류 (0) | 2020.11.22 |
---|---|
팜파스 공화국, 브라질 남부 3개州 분리독립운동 (0) | 2020.10.31 |
아직까지 남아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0) | 2020.10.27 |
국가별 인구 순위(30위까지) (0) | 2020.10.25 |
미국의 힘(AMERICAN POWER) (0) | 2020.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