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사형수였던 장군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frog.ko 2020. 10. 29. 11:23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로코솝스키(18961221~ 196883)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의 군인이었다.

 

폴란드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코솝스키는 제1차 세계 대전때 러시아군 기병대에서 복무하던 중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군대에 가담했다. 기병대에서 활약했던 그는 붉은군대에서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기갑부대를 중시하는 혁신적인 생각때문에 기병을 중시하는 보수파 고위 장교들과 충돌이 잦았다.

 

이것이 이유가 되어 1937년 대숙청 기간 동안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20년대 계급투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고 권력을 이미 공고히 하던 스탈린은 그것가지고도 안심할 수 없었던지 1930년대 중반,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혁명 동지들까지 적으로 몰아 처단하는 엄청난 학살극을 자행한다. 이른바 소련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1936~ 1937년 사이에 있었던 대숙청이다.

 

기병군단장으로 승승장구하던 로코소프스키는 1937년 어느 날 그의 집무실을 찾아 온 비밀경찰 NKVD 에게 체포되었다. 명분은 그가 제정러시아군 출신으로 출신 성분이 나쁘고 폴란드의 고정 스파이로 적과 오랜 기간 내통하고 있었으며 극동에서 근무당시 일본의 간첩들에게 정보를 넘겨주었다는 한마디로 말도 안 돼는 죄목이었다.

 

하지만 그가 숙청대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스탈린이 정적으로 찍어 사형시킨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지지자였다는 점이었고, 이와 더불어 앞의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평소부터 그를 시기하던 군부 내 다른 보수적 장군들의 음해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전통 군인의 길을 걸어왔던 로코소프스키는 소련군의 또 하나의 지휘체계인 당 정치위원들을 평소 혐오하였고 이들을 불손하게 대해 黨性에 의심을 받았다.

 

체포된 로코소프스키는 조사과정에서 자신의 죄명을 부인하자 혹독한 고문으로 무려 9개의 치아가 뽑히고, 3개의 늑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당했다. 거기에다가 수시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망치질 당했는데 이후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커다란 후유증을 얻었다. 이러한 고문 속에서 이뤄진 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언도받고 죽을 날 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듯 악랄한 만행을 일삼아 권력을 공고히 하려던 스탈린의 행태는 곧바로 독이 되어 소련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바로 제2차 대전 당시의 초기에 당한 망신이었다. 1939년 대 폴란드 침공에서는 별로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어 벌어졌던 핀란드와 겨울전쟁에서 대숙청으로 지휘체계가 무너진 소련군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대 망신을 당했다.

 

이때 대숙청 기간 중 화를 피한 몇 안 돼는 지휘관 인 주코프 ( Georgy Zhukov 1896~1974 )가 스탈린에게 아직 사형당하지 않고 수용소에 살아있는 유능한 지휘관들을 백의종군시켜 달라는 청원한다.

 

1940년 점증하는 독일의 위협과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동료들의 탄원으로 석방되었고 스탈린과의 짧은 면담 이후 키에프 군관구의 군단장으로 복직했다.

 

이후 로코솝스키는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붉은군대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 되었고, 소련군의 승리한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바그라티온 작전 등의 거의 모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1944년에는 원수로 승진하였다. 1945년에는 나치독일의 숨통을 끊는 베를린 공방전에도 참전했다.

 

전후에는 폴란드 주둔 소련군 사령관을 맡았고 스탈린의 명령으로 폴란드에 귀화하여 폴란드 국방장관과 소련 국방차관을 지냈다.

흑마를 탄 장군이 로코솝스키, 왼쪽 백마를 탄 장군이 주코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