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이자 현존하는 스웨덴의 왕가 베르나도테 왕가의 창시자이며 더 나아가 노르웨이 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여계 조상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며 매국노인 동시에 인생의 승리자라고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인생을 살아간 인물. 프랑스인이었지만, 결국엔 프랑스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프랑스군을 몰아내서 그 진영의 왕까지 되고 현재까지도 자신의 후손들이 그 진영의 왕위를 대대로 세습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배신자 중 한 명이다.
1763년 프랑스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17세에 왕립해군 육전대에 졸병으로 입대했다. 코르시카 등지의 해외 프랑스령에서 벌어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에 투입되어 혁명 발발 이전에 상사로 진급한다.
비귀족 출신이었던 덕에 혁명정부에 의해 장교로 임관, 1792년에 대령, 1794년에는 31세의 나이에 중장으로 진급한다.
일병에서 장군까지 오른 입지선적인 인물이었으며 군공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민중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 시기 베르나도트의 인기는 나폴레옹의 정치적 라이벌로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1796년 프랑스군이 라인강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대파되어 와해되었을 때, 군을 재편성해서 오스트리아군을 막아내어 명성을 얻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서는 사실상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묵인하기는 했으나, 중립을 지키면서 나폴레옹과 거리를 두고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베르나도트는 자코뱅 파였기 때문에 자코뱅 반대파인 나폴레옹에게 좋은 감정이기가 힘들었으나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킨 후 반대파였음에도 그를 중용하였고, 1804년에 원수로 임명했다.
이러한 승진 배경에는 자신이 버렸던 여성 데지레에 대한 나폴레옹의 사죄의 의미가 포함되었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베르나도트 자신은 이러한 승진에 걸맞은 무훈을 세우지는 못했다. 베르나도트는 1806년경부터 나폴레옹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 그 태도가 경계받아 군사재판에 결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데지레 클라리의 일 때문에 이 사건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모든 군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후의 추격전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장군을 항복시켰다. 이때 프로이센군과 동행하던 스웨덴군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훗날 그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베르나도트는 1808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스웨덴의 공격에 대비하여 윌란 반도에 주둔했다. 그 때 나폴레옹의 변심이 일어나 철수하였다. 그 후 베르나도트는 그 때까지의 혐의로 인해 나폴레옹으로부터 모든 임무에서 제외되었다.
1809년 스웨덴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대프랑스 강경파(반 나폴레옹)로서 러시아 제국에게 핀란드를 빼앗기는 등 군사적으로도 급진파였던 구스타프 4세 아돌프를 폐위하고, 대신 구스타프의 숙부였던 칼 13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칼 13세는 이 시기 이미 초로한 노인이었고, 추정 왕위 계승자였던 칼 아우구스트도 1810년에 급사해 버렸기에 스웨덴은 다음 후계자를 정할 필요성이 시급했다. 당시 스웨덴 장교들을 중심으로 유능한 나폴레옹의 육군 원수 중 한 명을 왕위 계승자로 원했으며, 칼이 죽은 후에는 이런 움직임이 더 거셌다.
베르나도트는 예전 스웨덴군 포로에 대해 관대한 처우를 한 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에 인접했던 독일 영지의 총독으로 일할 때 매우 성공적이었기에 스웨덴 국민사이에서도 베르나도트는 인기가 있었다. 스웨덴 국회는 "베르나도트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다면, 국왕의 후계자로 맞이할 수 있다."라고 결의했다. 베르나도트도 그 결의를 승낙했다.
나폴레옹은 베르나도트가 아닌 베르티에 등 자신의 다른 원수들을 추천했지만, 스웨덴에서는 다른 원수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사실 스웨덴에서는 처음에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이자 나폴레옹의 양자인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왕위 계승을 요청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외젠이 개신교 개종을 거부하자 베르나도트에게 왕좌가 넘어간 것, 결국 나폴레옹은 마지 못해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는 것을 승낙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실패로 인해 반나폴레옹 기운이 높아지자, 베르나도트는 반나폴레옹 연합군의 대열에 참가하여 프랑스군 내부사정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했다
일개 사병에서 원수, 그리고 왕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프랑스와 나폴레옹에게는 철천지 원수이자 배신자, 매국노이고, 폴란드와 노르웨이에게 있어서는 독립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침략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웨덴인들에게는 어려운 시대에 나라를 구하고 반석 위에 올려놓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스웨덴의 관점에서 보면 나폴레옹을 배신한 것이야말로 스웨덴을 위해 최선의 길을 선택한 것이고, 나폴레옹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반대로 자신을 믿어준 스웨덴인들을 배신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 잘했다 잘못했다를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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