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가을, 린뱌오가 동북을 장악하자 장제스는 패배를 예견했다. 극비리에 최측근들과 머리를 맞댔다. 핵심은 “중공군의 압박을 피하려면 정부를 어디로 이동하느냐”였다. 항일전쟁을 지휘했던 서남쪽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지리학자 장지쥔(張其均)이 대만 천도(遷都)를 건의했다. “중공은 해군과 공군이 없다. 대만으로 가면 한동안 저들의 추격을 저지할 수 있다. 물산이 풍부하고 일본인들이 건립한 공업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교통망도 쓸 만하다. 공산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지역이라 저항이 발생해도 진압하기 수월하다.” 지도를 볼 때마다 떠올랐던 대만의 생김새가 고구마에서 항공모함으로 바뀌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장제스는 300여 대의 전투기와 4개의 해군기지를 통째로 실어 날랐고 중앙군 30여만 명을 대만과 동남 연해의 섬에 배치했다. 그사이 대륙의 국민당 군은 거의 괴멸했다.
1949년 10월 17일 샤먼(廈門)을 점령한 화동야전군 10병단은 금문도 상륙을 서둘렀다. 병단사령관 예페이(葉飛)는 항일전쟁과 국·공전쟁을 거치며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청년 전략가였다. “눈앞에 보이는 금문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다. 대만의 교두보다. 저 병풍을 걷어치우지 않으면 우리가 봉쇄당할 날이 온다”며 지휘관들을 독려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교만이라는 고약한 세균이 머리 한구석에 침투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총명하고 냉정한 예페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신중국 선포 3주 후였다.
금문도에는 대만 원주민으로 구성된 국민당 신군(新軍) 2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가 대만에서 훈련시킨, 향토의식이 유난히 강한 부대였다. 예페이는 이들을 단순한 패잔병 정도로 생각했다.
당시 바다에는 대륙에서 철수한 병력을 실은 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 부대들이었다. 항일명장 후롄(胡璉)이 지휘하는 18군도 그 안에 있었다. 저장(浙江)성 주산(舟山)반도로 향하던 중 금문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롄은 국민당군이 대패한 화이하이(淮海) 전역(戰役)의 부사령관이었다. 중상으로 입원해 있을 때 “중공 측에는 린뱌오와 천이(陳毅) 등 몇 명 외에는 신통한 지휘관이 없다. 우리가 계속 지기만 하는 이유는 지휘관들의 자질이나 군의 사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세상 없는 지휘관과 제 아무리 용감한 군인들이라도 정치와 외교가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며 면회 온 장제스를 면전에서 들이 받은 적이 있었다. 장이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뒀다”며 웃는 바람에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한 게 8개월 전이었다.
10월 24일 밤, 한 척에 금 한 냥과 아편 한 덩어리를 주고 임대한 목선들이 금문도 상륙부대를 태우고 샤먼을 출발했다. 배 안에는 금방 찍어 낸 인민폐와 승전잔치에 쓸 돼지들이 병사들과 뒤섞여 있었다. 병사들은 돼지들이 꿱꿱거릴 때마다 입맛을 다시며 싱글벙글했다. 그날 따라 약한 동북풍이 불었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었다. 대만이라면 몰라도 패잔병이 우글거리는 쥐방울만 한 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양식도 하루치면 족했다.
배가 금문의 구닝터우(古寧頭)에 도착할 즈음 샤먼의 포대가 금문도를 향해 불을 뿜었다. 1979년 1월 1일 미·중 간의 수교로 막을 내리는 포격전의 시작이었다. 뱃사공들은 연안에 도착하기도 전 바다에 몸을 던져 상륙부대를 불안케 했다.
해상을 떠돌던 후롄의 18군이 금문도에 와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민 해방군은 초장부터 움직이는 곳마다 지뢰에 몸이 날라갔고, 부상병들은 주민들 몽둥이에 숨이 끊어졌다. 해군과 공군력의 지원이 따라야 하는 상륙전의 기본을 무시한 결과는 처참했다. 퇴로를 차단당한 채 3일 만에 죽거나 포로가 됐다.
금문도에 상륙한 해방군은 3일 만인 26일 오후 5시30분쯤 거의 전사하거나 투항했다. 대만 측에서는 2만 명이 금문도에 상륙했다고 하지만 전투병은 9000명을 조금 넘었다. 나머지는 뱃사공들이었다. 1만 명 정도 전사하거나 주민들에게 맞아죽고 4000여 명의 포로들은 이틀 후 대만으로 압송했다.
진먼 포격전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중국 인민해방군은 다진먼 섬ㆍ샤오진먼 섬에 대해 맹렬한 포격을 개시했다. 전투개시 2시간 만에 4만발, 하루 만에 5만7천발의 포탄이 사용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화민국 국군의 중앙지휘소ㆍ관측소ㆍ교통기관과 포병진지를 목표로 공격하여 중화민국 측에서는 44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때 진먼방위사령부의 부사령 지싱원(吉星文)ㆍ자오지아샹(趙家驤)ㆍ장지에(章傑)가 전사하였고, 참모장 류밍쿠이(劉明奎)와 진먼 시찰 중이던 국방부장 위다웨이(兪大維)는 부상을 당했다.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진마 지구를 탈취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고 경고하였다.
8월 24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진먼의 탄두진지, 랴오뤄 만(料羅灣, 요라만) 부두, 진먼공항 및 포병진지에 대해 포격을 집중시켰고, 이에 대해 중화민국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포병진지에 반격을 개시하였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항만과 공항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여 진먼의 봉쇄를 시도하였다. 진먼 봉쇄작전에 대한 대항수단으로서 미국정부는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파견하여, 중화민국 국군에 대한 물자 보급을 지원함과 동시에, 공군・해병대・육군의 합동 훈련연습을 실시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 경고하고, F-104A 전투기 등을 중화민국에 급파, 작전지휘센터를 설치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다.
8월 25일 이후, 중화민국군은 진먼에의 해상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야간 보급작전을 행하였지만, 중국 인민해방군은 수뢰정 등을 동원하여 보급 저지를 꾀하였다. 9월 1일 펑후 제도의 마궁 시(馬公)에서 출항한 중화민국군 보급함이 다음날 랴오뤄 만(料羅灣)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함정과 맞닥뜨려 9.2해전(九二海戰)이라 불리는 전투가 발생하였다. 중화민국 측은 이 전투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함정 10여 척이 격침되었다고 발표하였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충돌에 의해 2척이 침몰하였고 보급함 타강호(沱江号)가 큰 피해를 입혔다고 발표하였다. 또 공중전에서는 중화민국 측이 제공권을 확보하였다.
태무산 진먼방위사령부(太武山金門防衛指揮部), 기념원사령 유옥장 상장(紀念元司令劉玉章上將)의 석비. 유옥장과 후 리엔(胡璉)은 1950년대에 진먼 방위를 담당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중화민국에 진먼 다오와 마쭈 열도는 미국ㆍ중화민국 공동방위조약에 명시된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진먼 섬의 포기를 요구하였지만, 장제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은 사태해결을 위해 제3국을 통해서 진먼 방위 전투에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시사하였다(미국 공군이 푸젠 성의 샤먼 주변에 대한 핵공격을 계획하였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국 국방부의 기밀문서에 의해 2008년 밝혀졌다).
또 중화민국군에 대하여는 무기를 공여하였다. 소련 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미ㆍ소간의 핵공격을 촉발하지 말라'고 중화인민공화국에 경고했다. 9월 18일 이후에는 미국으로부터 8인치 유탄포가 진먼에 제공되었고, 9월 26일 이후 중화민국 국군은 대등(大嶝)과 이등(二嶝)의 중국 인민해방군 포병진지를 공격, 큰 피해를 입혔다.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怀)는 '진먼 섬에 대한 포격을 7일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고, 10월 13일에는 다시 2주간의 공격중지를 발표, 적극적인 공격을 멈췄고 포격전은 소강국면으로 전환되었다. 10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하루씩 걸러 포격한다'고 발표하였고 포격은 차츰 줄어들어 갔다. 최종적으로 전투가 중지된 것은 1979년 1월 1일 미ㆍ중 국교수립에 의해서였다. 국교수립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장 쉬샹첸(徐向前)은 『대ㆍ소 진먼도 등의 도서에 대한 포격전 중지 성명(停止砲撃大・小金门等岛屿的声明)』을 발표, 20년에 걸친 포격전은 마침내 멈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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