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전쟁 또는 아이슬란드 대구 전쟁(영어: the cod war 또는 영어: Icelandic Cod Wars, 또는 "영해 전쟁"는 1958년부터 1976년까지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에서 세 차례 일어난 ‘대구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슬란드는 당시 국가 수입의 95%를 어업에 의존하던 때였고, 대구의 황금어장이 바로 아이슬란드 근해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외국 어선들은 이곳을 자유자재로 드나들었고요. 그런데 경제 침체를 겪게 된 아이슬란드가 더 이상 이들의 남획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1958년 9월, 육지로부터 4해리(7.4㎞)까지인 바다의 국경, 배타적경제수역(EEZ)을 12해리까지로 넓히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때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유일하게 버틴 나라가 있었으니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어선을 가지고 있던 영국입니다.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슬란드 앞마당에서 조업을 계속하던 영국은 자국의 트롤선을 보호하기 위해 수십 척의 전함까지 투입했죠.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강한 해군 전력을 자랑하던 시절입니다. 아이슬란드의 전력은 고작 경비정 6척과 경비대원 100명이 전부였다고 하죠. 1차 전쟁은 영국이 한발 물러서면서 그럭저럭 마무리됐는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1972년 아이슬란드가 협정을 깨고 이번엔 EEZ를 50해리로 넓히겠다고 선언으로 2차 전쟁이 시작됐다. 아이슬란드는 50해리 안으로 들어오는 외국 어선은 무조건 나포하겠다고 엄포를 놨고, 그물 커터까지 동원해 영국 어선의 그물을 끊으며 조업을 방해했습니다. 대치는 1년 이상 계속됐고, 아이슬란드는 영국과 국교를 단절하는 것뿐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아이슬란드가 ‘벼랑 끝 전술’을 쓴 셈이죠.
이 결과, 영국 해군은 전함과 예인선을 동원해 아이슬란드의 영국 어업 단속을 막기 시작했으며 부수적으로 아이슬란드 연안 경비대의 선박과 영국 해군의 직접적인 충돌이 있었다.결국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탈퇴 불사라는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한 아이슬란드가 요구를 관철시켰다.
이 분쟁은 1976년 아이슬란드에게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보복 통첩을 받은 후 영국 함선의 200해리(370km)내의 함선 철수로 종료되었다. 영국 정부는 1976년 12월 1일 이후 영국 트롤어선이 분쟁 지역에서 어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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