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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몽골의 신하였다!

frog.ko 2020. 11. 1. 08:47

개국 태조 이성계(李成桂)에 대한 내용올 보면, 그를 '3척검두안사직(三尺劍頭安社樓)이라고 쓰고 있다.

 

안사(安社)는 이성계의 고조부로써 ()의 다루하치(達種花亦)였으며 고려의 화주(和州)이자 원()의 쌍성(홈총관부의 총독(집정관)을 했던 인물이라고 쓰여져 있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1170(고려 의종24)경부터이다.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이1174년에 정중부에게 피살되자 동생 이린이 고향인 전주로 낙향하여 현재의 오목대에 안착하여 토착세력이 되었다.이린의 아들이 이양무이고 손자가 이안사인데 이안사는 뜻하지 않게 전주를 떠나야 했다.

 

실록에 따르면 당시에 전주를 다스리는 주관(州官)이 전주지역으로 부임하는 산성별감(고려시대에 몽고군을 방어하기 위해 산성에 파견된 임시 관원)을 접대하기 위해 관기에게 수청을 들게 하였는데, 관기가 수청을 거부하여 죽였다고 한다. 주관과 산성별감은 그 죄를 관기를 사랑한 이인사에게 씌웠다. 농민반란 혐의였다.

 

억울한 이안사는 할 수 없이 자신을 따르는170여 가구1700여 명을 데리고 외가가 있던 삼척으로 이주하였다.삼척에서 왜구와 원의 침략을 막는데 일조하기도 했으나 얼마 뒤 전주에서 악연을 맺은 산성별감이 삼척이 속한 관동지역의 안렴사(고려 초기엔 안찰사로 불리다가 후기에 명칭이 바뀌었다지방장관을 뜻하며 전국5도에 파견되어 도내를 순찰하는 임무를 가졌다.)로 부임하자 다시1253년 경 해로를 통해덕원부(德源府;현재의 원산)로 이주하였다.

 

당시에 원나라는 고려의 북쪽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침략을 일삼던 시기인지라 고려 조정에서는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원의 침략을 막게 하였지만, 1254년의 원나라의 장군 산길(散吉)이 몇 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유하자 최씨 무신정권 치하의 고려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1000여 호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이후 남경의 오동(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여1255년 오동천호소의 우두머리천호(千戶)겸 다루가치(원의 중요한 관직 중 하나로 칭기즈칸이 처음 설치했다.)가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성계는 삼척검(三尺劍)올 휘두르는 무관집안 이안사(李安社)후손으로, 조를 세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계의 부친 환조 이자춘(李子春)까지 몽고인(고려인이 아님)으로써 원()나라에서 부여한 관직(삭방도병마사)을 했었다. 이성계의 아버지 몽고식 이름은 오노사불화(吾暑思不花)였다.

 

이성계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몽고인으로써 몽고()에서 고전지역에 파견한 72명의 달로화적(다루가치)의 한사람이었다.

 

원나라 1351년 황허 둑 쌓기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농민들이 백련교(白蓮敎) 주도로 허난에서 봉기했다. 백련교도 봉기군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하고 있어 홍건적(紅巾賊)이라고 불렸다.

 

홍건군의 봉기를 필두로 반란이 밀물처럼 일어났다. 소금거래업자인 저장(浙江)의 방국진(方國珍)에 이어 안후이의 곽자흥(郭子興)과 장사성(張士誠), 후베이의 서수휘(徐壽輝) 등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빈농 출신 걸승(乞僧) 주원장(1328~1398)1351년 곽자흥 군단에 가담했다. 주원장은 고향 안후이성 후저우(濠州)에서 서달(徐達), 탕화(湯和)와 같은 죽마고우들을 포함한 지휘관급 병사 700여 명을 모집했다. 영민한 자질에다가 우수한 장교까지 거느린 주원장은 곧 두각을 나타냈다.

 

원나라군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백련교도 유복통은 1355년 안후이의 박주(亳州)에서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추대해 송()을 세웠다. 홍건군 본류에 속한 곽자흥과 주원장 등은 형식적으로나마 송()을 받드는 모양새를 취했다.

 

원나라 조정은 유복통, 한림아의 반란을 원의 국기(國基)를 흔드는 중대사로 판단했다. 원 조정은 톡토와 차칸테무르를 사령관에 임명해 반란에 대처하게 했다. 원나라군과 한족 지주들은 연합군을 편성해 홍건군을 공격했다.

 

유복통은 카이펑을 수도로 삼고, 사방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그는 이런 이유로 원 조정의 목표가 돼 당대 제일의 명장 차칸테무르가 지휘하는 원나라 정규군의 공격을 받았다.

 

1359년 카이펑이 차칸테무르군()에 점령되자 유복통은 한림아와 함께 벽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허베이로 진출한 관선생은 타이항 산맥을 넘어 산시성 다퉁(大同)을 약탈한 후 동북진(東北進)해 원나라 하계 수도인 개평부(금련천)를 점령했다.

 

관선생은 원나라군이 추격해 오자 동쪽으로 달아나 랴오양(遼陽)을 함락하고, 압록강을 건너 1359년과 13612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했다.

 

홍건군은 베이징 부근을 우회해 근거지인 허베이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으로 탈출로가 막히는 바람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남하한 것이다. 홍건군의 제2차 침공 시 고려는 개경을 빼앗기고,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해야 했다. 고려는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이 모집한 의용병의 분전에 힘입어 겨우 개경을 탈환했다.

 

고려 동북면의 원나라 지방군벌 이성계(1335~1408)도 기병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성안으로 돌입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홍건군은 4로로 분산된 끝에 봉기 10여 년 만에 소멸됐다. 그가 집정관(점령지 총독)으로 부임한 곳이 쌍성(雙城)이였고 고려의 화주(和州)였던 것이다.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5(五代)가 쌍성의 군벌 및 호족(豪族)으로 군립하고 있었고, 이성계의 외가(外家)는 쌍성부 소속의 영홍진(永興鎭)에 있었다.

 

이성계의 출생지는 영홍(永興)이고 집안의 거점지는 쌍성(雙城)이란 두말할 펼요가 없으며 이성계 직계 선조들의(고부모까지)묘소도 모두 쌍성과 영홍에 있다고 세종실록지리지는 쓰고 있는 것이다.

 

이성계의 선조들은 테무게 왕가 영역 내에서 실력을 길렀다. 원나라 시대 만주 일대를 지배한 테무게 왕가는 나얀 시기 원나라 대칸이 되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에 실패한 후에도 제후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만큼 실력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고려 무신란주역 중 하나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손자인 이안사는 1255년 테무게 왕가로부터 천호장(千戶長) 겸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아 두만강 하류 일대를 지배했다. 이안사를 고조부로 하는 이성계 일가는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해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환조)은 공민왕 4에 와서야 처음으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동북면의 쌍성(雙城) 천호 자격으로 고려조정에 인사(來朝)를 차리러 온다고려정부에 이때 처음 래조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공민왕 4년 이전에는 쌍성지역이 고려의 통치가 미쳤던 지역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 이성계의 출세 발판은 홍건적의 평정에 있고 권력쟁취는 요동(遭東)정벌에서 찾을 수 있다따라서 1392년 조선 건국은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 간 새로운 관계 정립의 한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테무게 옷치긴(1168년 - 1246년)은 몽골 제국의 황족으로 초대 대칸 칭기즈 칸의 막내동생이다. 예수게이 바토르의 넷째 아들로 칭기즈칸과 동모(同母) 형제이며, 다른 동모형으로 주치 카사르, 카치운이 있다. 이복 형제로는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있다.
 
나이만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1217년부터 시작된 몽골의 서방 원정에서 어머니 호엘룬을 모시며 몽골 본토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원조비사》). 이는 그의 세력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대칸을 대신해 몽골과 요동, 고려 관련 업무를 맡게 된 테무게 옷치긴은 자신의 권세를 이용해 흥안령 동쪽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1220년 요동 지역에서 몽골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인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죽고 그의 처 요리씨(姚里氏)가 몽골에 와서 이를 아뢰었을 때 테무게 옷치긴은 스스로 황태제(皇太弟)의 신분으로 법도에 따라 요리씨에게 호부(虎符)를 달고 남편의 속민을 7년 동안 다스릴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그보다 1년 전인 1219년 마찬가지로 황태제 국왕의 자격으로 그리고 원수 카신(合臣), 부원수 차라(劄剌) 및 선차대사(宣差大使) 경도홀사(慶都忽思)와 동진국(東眞國)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흘석렬(紇石烈) 등 10인을 통해 고려에 조공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227년의 제5차 서하(西夏) 공격에서 형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대와는 다른 별동 부대를 이끌고 서하의 신도부(信都府)를 쳤다. 이 해에 칭기즈 칸이 죽자 조카 차가타이와 함께 우구데이를 새로운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하였다. 1230년부터 전개된 제2차 금나라 공격에서는 좌익군(左翼軍)을 이끌고 금나라의 수도 중도(中都)에서 황하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그는 황하를 건너와서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공포에 질린 금나라 백성들이 개봉(開封)과 그 주변으로 도망쳐 오면서 급작스러운 인구 유입으로 금나라에 식량 위기와 사회불안을 가져왔다. 테무게 옷치긴 왕가는 1233년 금나라 유민들이 지린 성 일대에 세운 동진국(東眞國)을 병합, 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금나라 멸망 뒤인 1236년 우구데이 칸이 시행한 분봉에서 익도로(益都路, 산둥 성 칭저우 시), 평주(平州, 허베이 성 루룽 현), 난주(灤州, 허베이 성 롼저우시)를 분여받았다.
 
1241년 말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유궁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우구데이의 황후들이 거처하는 오르두(행궁)로 향했다. 그러나 우구데이의 황후 퇴레게네 카툰은 "우리는 당신의 의붓딸이며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무장한 많은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 모든 백성과 군대를 불안하게 만드는가?"라 항의하며 거절하고, 앞서 서방 원정을 나갔던 우구데이의 아들 구유크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듣고 대칸의 자리를 포기, 퇴레게네 카툰에게 우구데이에 대한 조의를 전하고 철군하였다.

이러한 옷치긴의 거병은 앞서 우구데이가 옷치긴에 대해 시행했던 중앙집권정책에 수반한 강한 견제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뒤 테무게는 몽골 왕후(王侯)들을 인솔하고 새로운 대칸을 추대하는 쿠릴타이나 구유크의 대칸 즉위식에도 참석하였는데, 우구데이에 이어 차가다이까지 급서한 것에 테무게 옷치긴의 관여를 의심하는 의견도 존재하고 있다.
 
1246년 구유크가 대칸으로 즉위한 뒤, 앞서 그를 제치고 대칸의 지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것에 대해 툴루이 가문의 몽케와 주치 가문의 오르다(주치의 큰아들)에게 심문을 받았고, 그의 휘하 장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재판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이 판결 직후에 테무게 옷치긴 자신도 사망하였다.
 
형 칭기즈 칸에게 특별히 사랑받았으며, 라시드웃딘의 《집사》에는 칭기즈 칸이 테무게 옷치긴을 다를 형제들보다 특히 더 아껴서 그의 다른 두 친형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혔으며, 라시드웃딘이 살던 당시까지도 테무게 옷치긴의 자식들은 주치 카사르나 카치운의 자식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즉위한 뒤에는 다섯 천인대(밍간)을 받았고 나아가 어머니 호엘룬이 준 세 천인대를 이어받아 모두 여덟 천인대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다른 몽골 왕후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것이었고, 몽골의 전통적인 말자상속관행과도 관련이 있다.몽골 동방의 좌익부인 만주에 접한 지역에 유목지를 받아 다른 동모형제 주치 카사르, 카치운의 자손 등 동방의 왕후들을 통솔해 몽골 귀족이나 한인(漢人) 세력에 영향력을 가지고 몽골 제국 좌익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칭기즈 칸 사후 조카 우구데이의 옹립에 협력하였으며 몽골 제국의 동방을 대표하는 인물로써 우구데이 칸, 서방 지역을 통할했던 조카 차가다이와 함께 몽골 제국의 신체제를 구축하였다.
 
테무게 옷치긴의 맏아들 지브겐의 아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 칸에게 중용되어 원(元) 왕조 설립에도 공헌하였다. 테무게 옷치긴의 자손은 칭기즈 칸의 다른 동모동생 주치 카사르나 카치운의 집안과 함께 동방3왕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타가차르의 손자 나얀이 카이두의 난에 연좌되어 쿠빌라이의 친정으로 처형되었다.

13세기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