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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리히텐슈타인

frog.ko 2020. 11. 10. 01:44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남북 25km, 동서 6km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인구는 3만8,000명에 면적은 160㎢으로 서울의 4분의 1이다. 면적기준으로 바티칸 시티, 모나코, 나우루, 투발루, 산마리노에 이어 세계 여섯 번째로 작은 나라다.

공국(公國)은 황제(emperor) 또는 왕(king)이 아닌 공작(duke)이 다스리는 나라다. 대공이라고 높여 부르는데, Prince라 한다. 대공은 황제 또는 왕에게 통치권을 인정받아 독립적인 영토를 다스리며 왕위 계승권이 있는 군주를 의미한다.

 

이 지역은 본래 신성 로마 황제의 직할영지였으나,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한스 아담 1세가 제국의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 셀렌베르크 남작령(1699)과 황제 직할 영지인 파두츠 백작령(1712)을 매입하여 합쳤다. 그 뒤 171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의 윤허로 공국의 지위를 얻어 리히텐슈타인 공작이 되었다. 명칭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교의 리히텐슈타인 성에서 유래되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과 뒤이은 혁명전쟁 당시 오스트리아의 봉신국으로서 참전했다. 당시 리히텐슈타인 공은 오스트리아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하나였으며, 그는 기병 2,000기를 이끌고 보병 7,000여 명 규모의 일개 군단을 격파하는 무쌍을 벌이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가, 1806년 라인 동맹에 가입하고 1815년 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등, 이리저리 돌다가 1866년 정식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이 무렵의 군주인 요한 2세(별명은 "선량공 요한")는 70년 간 재위하면서(1858~1929년) 유럽 주권국의 군주 중에선 두 번째로 오래 재위했다.

 

본래 리히텐슈타인 공작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하인 탓에, 1866년 이후로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화폐를 사용하고 리히텐슈타인 공작가도 빈에 거주하는 등, 일종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오-헝 제국이 붕괴되면서 실질적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이후 1921년 신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으며 이전(1852년)에 오스트리아와 맺었던 관세동맹을 폐지하고, 새로이 스위스와 관세동맹 (1919년)을 맺고 스위스 프랑을 기본통화로 사용하고 있다.

 

이 나라는 스위스로부터는 독립국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스위스의 연방과 다름없다. 유럽 단일 통화인 유로를 쓰지 않고, 스위스 프랑을 통용하고 있다. 1919년부터 오스트리아와 관세동맹을 맺었고, 1923년부터 스위스와 관세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유럽경제지역(EEA)에 가입해 이웃나라와 자유로운 무역 관계를 열어놓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에는 인구보다 등록된 기업수가 더 많다. 조세피난처(tax haven)로서의 역할이 국부의 주요수입원이다.
세금이 낮고, 기업규제가 거의 없기 때문에 유럽의 많은 기업들이 페이퍼컴퍼니를 등록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나라의 위치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의 중간에 있기 때문에 이웃 선진국들의 조세피난처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유럽대륙의 금융중심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리히텐슈타인에는 17개 은행이 허가를 받아 영업하고, 3개의 비은행 금융회사, 71개의 공공투자회사, 그리고 다수의 보험회사, 재보험사들이 등록하고 있다. 게다가 270개의 신탁회사, 로펌 81개가 등록했다. 해외거주자의 법인등록만 해도 7만3,000건이 넘는다.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국제적인 경제,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제가 어려울때에는 왕실에서 국가 예산을 부담했다. 리히텐슈타인은 2차 대전이 끝난후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했다. 그때 왕실이 보물을 팔아 겨우 경제를 꾸려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등이 미국에 당시로는 최고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그후 1970년대부터 낮은 세율을 도입함으로써 해외기업을 유치해 작은 경제를 급격히 끌어올렸다. 리히텐슈타인 왕가의 재산은 2008년 기준으로 전세계 왕가 가운데 8위에 달하고, 주민들의 사람의 수준이 세계 제일로 올라섰다.

우표수입이 한때 국고수입의 3분의1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공작 가문이 국가 예산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공작의 권한이 크고 국민들도 인정하고 있다.



한편 리히텐슈타인 공작가는 체코슬로바키아에 1,600㎢가 넘는 영지(리히텐슈타인 영토의 열 배, 트로파우 공국)를 가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가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면서, 이후 체코 당국에 이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했다. 게다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거처를 리히텐슈타인으로 옮겼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독일계를 쫒아내면서 자국 영토 내의 리히텐슈타인 영지를 전부 몰수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공가의 영지인 현재의 리히텐슈타인으로 거주지가 확정된 것이다.

 

그래서 리히텐슈타인은 체코 및 슬로바키아와 외교 관계가 없었다가, 2009년 뒤늦게 수교했다. 그러면서 재판까지 갔지만, 패소했다.

 

리히텐슈타인 공가의 종가는 오스트리아에 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한 저택으로 어지간한 궁궐보다도 크다.

파두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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