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분쟁

코소보 내전

frog.ko 2020. 10. 12. 04:41

중세 후반 세르비아 네만자 왕조의 중심부였던 코소보는 12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까지 동방정교회가 번성한 곳이었다.

 

그러나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패한 후 15세기 중엽에 세르비아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8세기 이래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어와 슬라브어가 혼용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승리 후 코소보에 거주하던 많은 기독교계 세르비아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슬라브어 사용이 줄어든 반면, 알바니아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서 남아 알바니아어 사용이 늘어났다.1699년 오스트리아 군대와 함께 세르비아인들이 이곳을 침략했다가 패퇴했는데 이때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후퇴하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합류했다.

 

코소보의 인종 구성에서 알바니아인들이 많아지고, 1766년에는 페치에 있는 세르비아 정교회 관구가 폐쇄되면서, 세르비아 문화의 중심지로서 코소보의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그러나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의 발원지이며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항전한 성지로 여겨졌다.그러나 알바니아인에게도 조상이 살았던 고향인 것이다.

 

코소보는 신유고연방 세르비아공화국에 속해있으며 주민의90%가 알바니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1989년 자치권이 박탈되자 코소보 공화국은 세르비아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며 북부 코소보는 코소보 세르비아인의 최대 거주지이지만 코소보 지역 대부분을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데, 아직 많은 나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미승인 국가이다.

 

소수의 세르비아인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 사람들을 문화탄압, 일자리 박탈, 인종정화라는 이름의 학살로 탄압했으며, 결국 1999년 코소보 전쟁으로 민족갈등이 폭발했다.

 

코소보에서 알바니아 민병대가 세르비아군을 습격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가 공격을 가했다이에, 나토가 경고를 가했지만, 세르비아는 이를 무시, 결국 나토가 공습을 개시한다.내전의 원인이 민족및 종교 분쟁 같지만 내적으로는 코소보에 엄청난 양의 금맥이 있다고 한다.

 

세르비아로서는 포기 할 수 없는 전쟁인 것이다결국 19996UN의 평화안을 수용하여 휴전하였으나 재발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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