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나폴레옹과 가리발디 그리고 이탈리아의 통일

frog.ko 2020. 12. 6. 16:19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가 멸망(BC. 476)530년대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이탈리아 수복전쟁은 이후 550년대까지 지속되면서 로마시를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를 황폐화했다.

 

동로마의 승리 후에도 나락으로 떨어진 상황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고, 568, 게르만족의 일파인 랑고바르드족의 왕 알보인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이 세워져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774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점령하여 프랑크 왕국에 합병했다. 이후 840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었고, 이탈리아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한다. 다시 중프랑크 왕국이 분열되고 여기서 중세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한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을 독일 왕국의 오토 1(신성로마제국)가 합병하고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을 세운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왕국과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 산하 제후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다.[3] 그러나 중세 이탈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나 독일 왕국과 마찬가지로 거의 명목상의 왕국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독립적인 여러 제후국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중세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에는 제노바 공화국, 밀라노 공국을 비롯한 여러 도시국가들이 분립하였다.

 

그러나 16세기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일부 지역을 상속받게 되면서 이탈리아는 다시 신성 로마 제국 및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이 쇠락해감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는 주변국의 알력 다툼이 심해진다. 이러는 와중에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고 1814년 이루어진 빈 회의의 결과 빈 체제가 성립하면서 여러 군소국가로 분열되었으나, 실상은 오스트리아에 예속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전파된 자유주의 사상에 힘입어 빈 체제에 항거하는 운동(마치니의 카르보나리당)이 일어났다.

 

1848년의 혁명에서 청년 이탈리아당은 자유로운 이탈리아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활약하였으며, 사르데냐의 왕()인 카를로 알베르토가 통일전쟁을 일으켰으나 오스트리아군에게 제압돼 실패했다.

 

이로부터 통일의 주도권은 사르데냐의 신왕(新王)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밑에서 재상(宰相)이 된 카부르에게 옮겨졌다. 카부르는 산업을 육성하여 국력의 강화를 꾀하였고, 크림 전쟁에 출병하여 프랑스의 지지를 얻었다. 사르데냐는 1859년에 나폴레옹 3세의 후원을 얻어서 오스트리아와 싸워 롬바르디아를 획득하고 나아가서 중부 이탈리아를 병합하였다.

 

한편 청년 이탈리아당의 가리발디는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여 사르데냐의 왕()에게 헌상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초대 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어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의 전쟁을 계기로 베네치아를 병합하고,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에 편승해서 교황령(敎皇領)을 점령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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