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 시대(Potop)는 17세기 중후반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일어난 국가적 대혼란으로 좁게는 1655~60년에 있었던 스웨덴과의 북방전쟁만을 가리키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는 1648년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카자크 대봉기에서부터 1667년에 끝난 러시아와의 전쟁까지의 기간을 모두 포함한다.
대홍수 이전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의 동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한 강대국이었지만 대홍수의 결과 연방은 인구의 1/3을 잃고 나라가 분열되었다. 반대로 이 전쟁이 끝난 후 루스 차르국은 중요한 영토 획득에 성공해 이후 동유럽에서 강대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발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우크라이나 카자크들과 슐라흐타 간의 갈등에서 터졌다. 당시 카자크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고 있는 폴란드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과 등록 카자크군으로서 복무해왔다.
하지만 폴란드 귀족들은 카자크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왔고 거기에 농노제와 가톨릭 신앙까지 강요하려 하자 결국 오랫동안 묵은 응어리가 카자크인 흐멜니츠키의 야심과 결합해 이전까지의 봉기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의 봉기로 발전했다. 심지어 당시 유럽 최강이던 폴란드 기병에 맞서 카자크의 약점인 허약한 기병을 보완하기 위해 흐멜니츠키는 카자크와 원수지간이던 크림 칸국의 타타르 기병까지 봉기에 끌여들었다.
카자크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은 결국 흐멜니츠키는 최후의 수로 같은 루스 세력인 러시아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폴란드 전역을 생지옥으로 바꿔놓는 대재앙으로 번지게 되었다.
카자크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가 직접 공격에 나서면서 폴란드는 순식간에 국토 절반이 점령당했다. 이후 스웨덴도 브란덴부르크와 함께 침공해 오면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들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를 일으켰고, 타타르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후 폴란드의 전설적인 명장이자 대귀족(왕당파)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파베우 얀 사피에하, 얀 소비에스키, 스타니스와프 포노츠키 등이 이끈 폴란드군이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 러시아 등에 맞서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두었고, 1660년에 올리바 조약을 체결하여 리보니아의 영유권과 얀 2세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 주장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와의 전쟁이 남아있었다. 러시아와의 전쟁은 1668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1668년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맺었다. 포원카(Połonka), 루바르(Lubar), 바시아(Basia) 강, 추드누프(Cudnów) 등에서 폴란드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쟁 막판에 흘류키프(Hlukiv) 공방전에서 타타르가 발을 빼고 계속된 전쟁에 지친 리투아니아군이 후퇴하는 등 군대가 붕괴하면서 다 말아먹고 말았다.
이 전쟁의 결과 폴란드는 전체 인구 중 1/3이 사망하거나 외국으로 편입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무엇보다도 리보니아와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 폴란드 변경의 주요 부분들이 다 날아가버려 정치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전성기만 해도 그럭저럭 지배층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제대로 작동하던 귀족회의도 나라가 망조가 드니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침투에 넘어가 이후로는 얀 소비에스키의 재위 시절 빼고는 나라 정치 자체가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상당한 영토를 상실한다. 일단 프로이센이 독립해버렸으며, 카자크 영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대 전부를 러시아에 할양해야했다. 거기에다가 대러시아 전진 기지 겸 방어 거점 스몰렌스크도 덤으로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연방의 국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러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대홍수 시기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카자크들에게 학살되었고 얀 2세의 경우 계속되는 전쟁과 반란에 진절머리가나 왕위에서 퇴위해 프랑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제르맹테프레의 명예 수도원장으로 지내다가 1672년에 죽는다. 또한 연방을 배신했던 리지비우가는 두 배신자로 인해 주변에 경멸을 받았고 야노슈의 종제인 보그스와프 또한 멸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2년 뒤 반환될 키에프를 반환하지 않고 계속 힘을 비축해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삼키게 되었고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을 손에 넣은 뒤 눈에 보이지 않은 성장을 하며 국명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바꾸며 점차 강대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 독일 제국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카자크들의 경우 좌우로 나누어 러시아령이 된 좌안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크 헤트만국이라는 자치 국가를 세우게되나 결국 18세기 자포로제 카자크가 해체되면서 서서히 자치권을 잃어버렸고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 끝에 맺은 카르디스 조약으로 발트해 전체를 석권하나 결국 대북방전쟁의 결과, 표트르 1세의 러시아 제국에 의해 리보니아와 잉그리아 등을 잃고 국왕인 칼 12세가 전사하는 등 불운을 겪으며 발트해의 강국의 위치를 잃고 2류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어째든 이 대홍수를 전후해 유럽의 강대국의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폴란드 분할은 국가 지배층들의 무책임과 무능이 국가에게 미치는 해악을 보여준다. 이 시기 폴란드의 주변국, 즉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은 계몽전제군주의 지도 하에 강국으로 거듭나고 근대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개혁의 구심점이 될 군주의 권력이 지나치게 미약하였고, 반대로 귀족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력하였다.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무책임하게 활용하였다. 즉 변화하는 시대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개혁의 진행을 막았으며, 국내의 농민과 부르주아들을 지나치게 억압했다.
그 결과 폴란드는 그 크기에 비해 굉장히 허약한 국가가 되었다. 폴란드보다 훨씬 작은 프로이센이 220만의 인구에 8만의 상비군을 보유했는데, 같은 시기 폴란드는 인구가 1,000만이 넘었지만 상비군이 3만을 못 넘었다.
▣분할 반대
강대국들의 땅따먹기 놀이였다 하더라도 일단 형식적으론 주변국에게 영토 일부를 양도한다는 내용에 관해 폴란드 의회인 세임(Sejm)의 투표를 거쳐야 했는데, 일명 '리베룸 베토라고 불리는 세임 특유의 만장일치제 때문에 의원의 전원 찬성이 나와야 양도 조약의 통과가 가능했다.
이 때문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은 양도 조약 투표를 위한 세임으로 기존의 만장일치제의 세임이 아닌, 다수결 제도의 연합 세임(sejm skonfederowany)으로 소집할 것을 강요했으며 대부분의 의원들을 매수, 혹은 협박으로 회유해서 찬성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조국의 영토를 적들에게 떼어줄 수 없다는 일부 의원들의 반발이 있었는데 결국 대부분의 의원들이 굴복하면서 세임 소집안이 통과되고 국왕까지 이를 비준하면서 의원들이 회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타데우시 레이탄이라는 반대파 의원 한 명이 회장에서 웃통을 까고 바닥에 드러눕고, 문을 막아 의원들이 회장에서 떠나는 것을 막으면서 '폴란드를 죽이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라'고 외치며 저항했다.
그러나 의원들은 문앞에서 드러누은 레이탄을 발로 밟고 회장을 빠져나갔으며 레이탄을 비롯한 소수의 반대파 의원들이 항의의 표시로 이틀 동안 회장에 남아서 단식농성을 벌이다 3국의 대사들이 찾아와 레이탄에게 내린 형벌을 면해주고 다른 징계를 주지 않는 조건으로 농성을 중단했다.
세임 자체는 조약이 통과되고 3년 후인 1776년까지 소집이 되었고 레이탄은 계속해서 조약 체결 반대 운동을 벌였으나 그의 영향력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1775년 레이탄은 러시아군에 의해 강제로 세임을 떠나 고향의 저택에 사실상 감금당했고, 폐인이 되다가 1780년 나라를 지키지 못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유리조각을 삼켜 자살했다.
▣12년 후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1807년 프로이센을 무찌르고 틸지트 조약으로 프로이센이 먹은 폴란드를 토해내게 해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줬고, 1809년에는 오스트리아도 무찌르고 쇤부른 조약으로 오스트리아가 먹은 폴란드도 토해내게 해 바르샤바 공국에 더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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