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

백정(白丁)

frog.ko 2021. 5. 31. 10:53

백정은 현대의 인식으로는 옛날에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했었던 사람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최하급 계층이었으며 법률상 양인였지만 조선시대의 팔천(八賤)에 속하는 존재였다. 그나마 8천 중에서 가장 천한 신분였던 천민보다도 더 안 좋은 취급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여덟 천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한 농민층을 의미하던 고려의 백정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양민(良民)·촌민(村民)·백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대신에 백정이라는 용어는 주로 도살업·유기제조업·육류판매업 등에 종사하던 천민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백정을 고려시대의 백정과 구분하기 위해 ‘신백정(新白丁)’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였다. 이들을 백정 또는 신백정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423년(세종 5)의 일인데, 이 때 이전까지의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을 백정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백정은 그 이전의 재인과 화척을 합해 통칭한 신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헌에 따라서는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은 화척이고 재인은 백정 계열과는 다른 계층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이전의 화척을 ‘화척’ 또는 ‘백정’이라 하고 재인은 ‘재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재인과 화척을 구분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재인과 백정이 모두 유목민족 출신으로 그 생활상에 차이가 없으며 직업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없지만 조선시대의 백정은 재인과 구별되는 것이다. 즉 그 이전의 화척이 개명된 것이라 보아야 옳다.

 

이러한 조선시대 백정의 기원은 멀리는 삼국통일 때까지, 가까이는 신라 말 고려 초까지 소급된다. 즉,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말갈인·거란인들이 우리나라에 흘러 들어와 양수척(楊水尺)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였다. 이들이 그 뒤 화척으로 변모했다가 조선시대에 백정으로 개칭된 것이다.

 

이들 백정은 고려 이후에도 대내외적 혼란기를 틈타 계속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백정 또는 그 전신인 화척은 대개 유목민족 출신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들은 조선 사회에 정착하면서도 유목민족의 생활 습속을 버리지 못하였다.

 

즉, 그들의 일부는 이동 생활을 하면서 수렵·목축을 하기도 하고 유랑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유목 민족적 특성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이 생기면 자주 민가를 습격해 재물을 약탈하거나 방화·살인 등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외적과 내통하거나 외적으로 가장해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즉, 고려 말기에는 양수척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거란병의 향도 구실을 했고 왜구로 가장해 노략질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란(作亂)은 조선 초기에도 계속되었다.

 

한편 조선 사회에 정착한 이들 백정의 일부는 유목민적 생활의 연장으로서 유기 제조와 판매, 육류 판매 등의 상업에 종사해 그들이 제조한 유기(柳器)를 공납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은 수렵·목축 등의 생활에서 터득한 짐승 도살의 기술을 살려 우마(牛馬)의 도살업에도 진출하였다.

 

이 우마의 도살과 그 판매는 상업상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므로 백정들은 이를 생활의 적극적 방편으로 삼았고 독점성까지 띄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백정 이외에도 거골장(去骨匠)이라 하는 양인출신의 전문적 도살업자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 이들 거골장이 사라지면서 도살업은 백정들에 의하여 독점되었다. 그리하여 이 도살업은 백정들의 대표적인 직업으로 발전해 갔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백정들은 유랑·수렵·목축·절도·도살·이적행위·유기제조 등을 주된 생활 방편으로 삼았다. 반면 농경에는 별로 종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해 주거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지배층들은 서울과 지방에 산재한 백정을 모두 찾아내어 각 방(坊) 및 촌(村)에 나누어 보호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장적을 만들어서 백정의 출생·사망·도망 등을 기록, 보고하도록 했으며, 도망하는 자는 도망례(逃亡例)에 의해 논죄하였다.

 

또한 이들을 농경 생활에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지급하기도 하고 혼혈정책·행장제(行狀制), 군역에의 동원 등을 시행하였다. 즉 국가는 이들 백정을 농경에 종사시키기 위해 토지를 지급하고 호적에 편입시켰을 뿐 아니라 국역에도 편입시켰다. 그리고 능력 있는 자는 향학(鄕學)에 참여할 수 있게도 하였다.

 

한편 그들만의 집단적 생활을 금지하고 일반 평민과 함께 섞여 살도록 했으며, 평민과의 혼인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의 거친 유목민적 기질을 순화시키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이들의 유랑을 막기 위해 그들이 이동할 때는 반드시 관에서 발급하는 행장을 소지하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민첩하고 강인한 기질과 유능한 마술(馬術)·궁술(弓術) 등을 이용하고자 군역에 편입시키고 내란·외란 등의 진압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군역에 동원하는 정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즉 유랑에 익숙했던 이들 백정들은 영농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일반 평민들은 천한 이들과 혼인하기를 꺼렸으며, 지방 수령들이 행장제 시행 과정에서 여러 가지 폐단을 야기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이들의 집단적 유랑이나 사회적 작란 등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이전부터 행해 오던 직업인 유기제조·도살업·육류판매업 등에 활발히 진출하였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에 이들의 일부는 지방 토호들에게 점유되어 사노비(私奴婢)와 비슷한 처지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에도 그들은 주로 토호의 요구로 재살(宰殺)에 종사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의 백정은 신분적으로 천인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각종의 부담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 평민 중에서도 생활이 곤란해지면 백정으로 변신하는 자의 수가 매년 증가함으로써 백정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갔다.

 

천민으로서의 백정은 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으로 신분적으로 해방되었다. 법제적으로도 이후에는 백정이라는 신분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지속되었던 일반민의 이들에 대한 차별 의식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들과의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생활하는 것조차 꺼렸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자녀의 교육 문제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고, 각종 연설회·유희회에의 참가를 거부당했으며, 촌락의 공동 행사와 의복착용·음주 등에서도 차별 취급을 받았다.

 

결국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백정 신분은 엄연히 존재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산재해 있던 백정의 호수와 인구는 7,538호에 3만 3712명이었다고 한다.

 

조선말기 백정의 모습을 묘사한 글을 살펴보면 백정의 겉모습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겉모습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899년 조선에 상륙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W.F.샌즈’가 인천 제물포항에서 처음 본 조선인이 바로 백정이다.



W.F.샌즈가 ‘극동회상사기(1930년 발행)’에서 묘사한 백정의 모습은 인상착의가 동양인과는 사뭇 달랐는데 눈동자가 회색이나 푸른색 혹은 갈색이었고, 머리칼은 붉고 안색이 좋았으며 키가 180cm를 넘었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얇은 파란 눈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W.F.샌즈는 백정을 혼혈 혈통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고려시대 백정의 또 다른 이름은 ‘달단(韃靼)’이다. 달단은 타타르족을 일컫는 말로 중국 한족의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총칭으로 명나라에서는 동몽고인을 가리켰고, 지금의 네이멍구와 몽골 인민공화국 동부에 거주해있다.



고려시대 거란과의 전쟁 과정에서 북방 유목민들이 대거 고려 땅으로 넘어오게 됐다. 이들은 고려땅에 정착하면서 ‘화척’ 혹은 ‘양수척’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북방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키가 상당히 컸고, 골격도 상당히 컸으며, 이목구비도 또렷했다.



우리가 흔히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람들을 보고 ‘백정’같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체격이 상당히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들은 북방 유목민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가축을 다루는 솜씨가 남달랐고, 그러다보니 고려에서 도살업을 주로 하게 됐다. 때문에 ‘백정=도축업자’로 이미지가 각인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녔고, 도살업을 주로 했으며 자신들끼리의 집단생활을 좋아했다. 이 모든 것이 북방 유목민족의 습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때 넘어온 북방 유목민족들이 조선말까지 백정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생활을 하지 않고 그들만의 생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조선 세종 때인 1423년(세종 5)에는 천민이란 인식을 없애기 위해 그동안 ‘화척’ 혹은 ‘양수척’으로 불렀던 사람들을 ‘백정’(일반 평민)으로 부르게 됐다. 그리고 우리땅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으며 살라고 각종 혜택을 줬다.



하지만 백정은 본래 북방 유목민족이라서 자기들끼리 집단생활과 유랑생활을 하면서 도축업을 도맡게 된다.



또한 일반사람들은 이들을 ‘신백정’이라고 부르게 됐고, 화척은 화백정, 재인은 재백정이라 따로 부르게 됐다. 이로 인해 백정은 천시되고 멸시를 받게 됐다.



그럼에도 백정은 우리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356년(공민왕) 때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찾아내서 주로 서북방 경계를 담당하는 군사로 충당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유목민적 기질과 농경에 정착하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산악지대에서 오랑캐를 상대할 수 있는 군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말 왜구 격퇴와 1419년(세종1) 대마도 정벌, 1467년(세조 13) 이시애 난을 진압할 때 백정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또한 세종대 이후 갑사 혹은 별패 혹은 시위패 등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세도정치 시절에는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정의 문란)으로 인해 평민들의 부담이 허리를 휠 정도가 되자 일부 평민들은 백정으로 자진해서 편입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기존 백정과는 다른 모습의 백정이 나타나게 된다. W.F.샌즈가 백정을 ‘혼혈혈통’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계속해서 백정들과 일반평민들이 섞이게 되면서 기존 백정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면서 현대에서는 백정과 일반 국민을 구분할 수 없게 됐다.



한편,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신분해방을 했지만 일반민 사이에서 백정에 대한 인식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일제강점기 때에는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이 되면서 백정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는 ‘백정’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사라졌다.



하지만 불과 백오십년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파란 눈’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백정’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로 들어온 북방 유목민족을 우리는 ‘백정’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는 백정들을 우리 국민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해왔었다.



하지만 쉽게 섞이지 못한 그들의 습성 때문에 몇백년을 이어왔었다가 결국 구한말이 돼서야 섞이면서 오늘날에는 기존 백정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백정(白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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